‘CEO가 현장 떠나 있으면 판단 오류’ [뉴데일리경제 박정규 대표 칼럼]
  • ▲ 정주영은 현장을 목숨보다 중시한 경영자였다ⓒ
    ▲ 정주영은 현장을 목숨보다 중시한 경영자였다ⓒ

    ‘현장에 모든 답이 있다!’

     

    기업이 커지면서 조직이 관료화돼 사원-과장-부장-상무-전무-부사장-대표이사 등 복잡한 단계의 결정과정을 거치다 보면 현장의 실제 상황이 왜곡되기 쉽다.

     

    실제로 CEO들이 중역들의 보고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아 경영하다가 대규모 프로젝트에서 실패해 수백억씩 손해를 입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이같은 폐단을 막기 위해 최근에는 중요한 보고에 담당 실무자를 배석시켜 보고 과정에서 내용이 왜곡되지 않도록 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정주영 고 현대그룹 창업주는 모든 중요 사업을 직접 현장에서 챙겼다. 현장을  몸소 진두지휘하면서 조직의 긴장도를 높이고,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등 경영에서 ‘현장’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현장은 입찰 준비단계부터 입찰 과정, 수주 후 공사 현장 등 모든 과정이었다.

     

    현장에서 그는 ‘저승사자’이면서 ‘해결사’였다. 정 회장은 중요한 현장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았다.

     

    어느 순간 불시에 나타날지 몰라 현장 직원들은 긴장과 초조의 날들을 보내야 했다. 게으름을 피우다간 언제 정 명예회장의 따귀가 날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시멘트 공장에서든, 조선소 블록 현장에서든 그는 어느 순간 지프를 타고 나타나 조는 기사가 있으면 “얼마나 비싼 장비인데 이렇게 한가하게 졸고 있느냐”며 상소리를 하거나 따귀를 때리기 일쑤였다. 정강이를 걷어차기도 예사였다. 그래서 그는 현장에서 ‘저승사자’ ‘호랑이’로 불렸다.

     

    그가 현장을 중요시하게 된 것은 6.25전쟁 후 수주한 고령교 복구공사 때문이었다. 적절한 가격에 수주하기만 하면 된다고 보고 금액 산정 과정에서 실무자들의 말만 듣고 입찰에 참여해 수주했는데, 공사를 진행하면서 물가가 폭등해 당시 짊어진 부채를 터는데 10년 이상 걸리는 등 막대한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다.  

     

    입찰 가격 산정 때 물가 급등 상황까지 면밀하게 반영해 입찰가격을 현실적으로 써넣었든지, 아니면 최종 계약 때 물가변동에 따른 가격 조정 단서 등을 넣든지 했다면 ‘고령교의 악몽’은 없었을 것이다. 무리한 금액으로 수주한 것 보다는 아예 수주를 하지 않는 것이 백번 나았을 터였다.

     

    이후 정주영은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적당히 보고만 받는 일이 없었다. ‘쓰러져도 현장에서 쓰러지겠다’는 각오로 모든 중요 현장들을 직접 챙겼던 것이다.

     

    현장 십장 역할...단군 이래 최대 프로젝트 ‘경부고속도로’ 

     

  • ▲ 단군 이래 최대 프로젝트였던 경부고속도로 공사 모습ⓒ
    ▲ 단군 이래 최대 프로젝트였던 경부고속도로 공사 모습ⓒ

    1968년 착공된 경부고속도로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국내 건설업체 중 유일하게 해외 고속도로 건설 경험을 갖고 있는 정주영 회장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동남아와 달리 지형이 복잡하고 터널 공사가 많은 경부고속도로는 날마다 전쟁판이었다.

     

    정 회장은 매일 새벽 집에서 나와 현장으로 달려가 하루 종일 십장 노릇을 하다가 밤에야 서울로 올라오곤 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쯤 서울의 고속도로 초입 말죽거리에서 책임자를 동승시키고,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도로만 내다보면서 쉬지 않고 야단을 쳤다. 지시한 것은 잘 처리했는가, 물은 잘 빠지고 있나, 스펀지 현상은 안 나타나나, 일일이 체크하고 현장 정리 정돈도 엄하게 질책했다. 결재사항들은 본사까지 갖고 올 것도 없이 현장에서 직접 처리했다.

     

  • ▲ 단군 이래 최대 프로젝트였던 경부고속도로 공사 모습ⓒ

    당제터널 공사로 정신이 없던 어느날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현장 사람들은 모두 비옷에 장화를 신고 일을 하는데, 그는 새벽 서울에서 맑은 날씨에 출발한 터여서 비옷도 장화도 없이 장대비에 그냥 철버덕거리며 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발에 맞는 장화가 현장에 일을 리가 없었고, 다른 사람의 우비를 벗겨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현장소장이 운전수에게 ‘대전의 시장에 가서 장화 한 켤레를 사다드려라’고 심부름을 보내면서 발 치수를 물었다.

     

    “12만7 짜리 있으면 좋은데, 최소한 12문은 사와야 한다고.”

     

    몇시간 후 운전수는 그냥 돌아와서 대전의 시장을 다 돌았는데 11문반 짜리가 제일 큰 것이어서 빈손으로 왔다고 했다.

     

    정주영은 그날 저녁 물먹은 빵처럼 불어버린 운동화와 양말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차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 심한 몸살로 며칠을 앓아야 했다.

     

    현장은 당제터널 난공사로 연일 초비상이었다. 예정됐던 공기가 2개월이나 지연되고 연일 인명사고까지 이어졌다. 손해를 감수하고 일반시멘트보다 20배 빨리 굳는 초고가 조강시멘트를 투입하는 등 정회장의 기민한 판단으로 공사는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1970년 6월 27일 밤, 3개월로 예정됐던 터널 공사가 25일 만에 뚫리자 ‘만세!’가 터져나왔다.

     

    초인적으로 현장을 뛴 정주영 회장, 현장에서 연일 들볶던 정회장 때문에 고생하던 직원들의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휩쓸려 내려가던 순간이었다.

     

    ▶구두끈도 못 푼 채 취침, 웅덩이물로 얼굴 씻고 현장으로

     

  • ▲ 현대중공업 야드에서 기술진과 토론하는 정주영ⓒ
    ▲ 현대중공업 야드에서 기술진과 토론하는 정주영ⓒ

    1972년 3월. 8천만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현대조선소(현대중공업) 기공식 이후 본격적인 조선소 건설이 시작됐다. 프로젝트는 조선소 건설과 동시에 리바노스가 주문한 26만톤급 초대형 유조선 2척을 건조하는 것이었다.

     

    태완선 부총리를 비롯한 정부 각료들은 물론 국내외 조선산업 전문가들 모두 ‘현대가 전혀 가능성 없는 일에 승부를 걸었다’고 머리를 내저였다.

     

    현대가 해내리라고 믿는 사람은 정주영 회장 한 명. 그리고 ‘죽기살기로 하면 무조건 되니까 일단 해보라’고 다그치는 정 회장의 성화에 무서워 따라주는 임직원들 뿐이었다.

     

    대통령이 나서서 조선소가 하루 속히 완공되도록 지원해주라고 했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행정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진입도로를 건설해야 하는데 정부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도로 건설을 자꾸 지연시켰다. 답답해진 현대가 스스로 도로를 닦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경상남도가 ‘사전 공사는 위법’이라며 제지하고 나섰다.

     

    직원들이 송사에 얽혀드는가 하면, 경상남도 도시계획위원회는 ‘사업 타당성에 의구심이 간다’며 사업본부 관계자들을 뻔질나게 불러들였다.

     

    정주영은 거의 울산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낮도 밤도 없이 거의 365일 돌관 작업을 벌였다. 대부분 임직원들이 새벽에 일어나 여기저기 고인 웅덩이 물에 대충 얼굴을 씻고는 일터로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구두끈도 못 푼 채 자곤 했다.

     

    현대는 선박 2척을 만들면서 동시에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하고, 안벽을 만들고, 도크를 파고, 14만평의 공장을 지었다.

     

  • ▲ 현대중공업이 도크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건조한 리바노스의 초대형 유조선 2척ⓒ
    ▲ 현대중공업이 도크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건조한 리바노스의 초대형 유조선 2척ⓒ

     

    전혀 경험이 없는 초대형급 배를 건조하다 보니 황당한 소동도 적지 않았다.

     

    선박 바닥에 깔아 일정한 무게로 균형을 유지하는 자갈을 수입했는데, 모두 강도가 약해 외화만 낭비하고 결국 우리나라 자갈을 써야 했다. 자재 수량 견적도 제대로 못해 주문한 철판을 잘라 써보니 조각이 실제 필요량의 두 배씩이나 남는가 하면, 수 만 개의 철판조각을 잘라달라고 한쪽 부서에서 주문했는데, 나중에 ‘왜 아직 철판이 안오냐’ ‘보냈는데 왜 안받았다고 하느냐’ 는 등 소동의 연속이었다.

     

  • ▲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열린 리바노스 유조선 명명식. 육영수 여사가 '애틀랜틱 배런호'를 명명하고 있다.ⓒ
    ▲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열린 리바노스 유조선 명명식. 육영수 여사가 '애틀랜틱 배런호'를 명명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정 회장은 ‘이 놈의 자식, 저 놈의 자식’ ‘병신 같은 놈’ 하면서 현장 재판을 하다시피 시시비비까지 가려야 했다.

     

    우여곡절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현장을 뛰면서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는 정회장의 판단력과 혜안에 힘입어 난제들도 하나씩 극복됐다.

     

    1974년 6월. 현대는 드디어 최대건조 능력 70만톤, 부지 60만평, 70만톤급 드라이도크 2기를 갖춘 국제 규모의 1단계 조선소를 준공했다. 리바노스의 유조선 2척도 건조하는데 성공했다.

     

    현대는 최단 시일에 조선소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26만톤급 유조선을 건조해낸 기업으로 세계 조선사(造船史)에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