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해가 안뜨냐' 새벽마다 도보로 출근... ‘근면 검소하면 모두 성공할 수 있다’ 교훈 남겨
  • “새도 부지런해야 좋은 먹이를 먹는다. 하루 부지런하면 하룻밤을 편히 잠들 수 있고 1년, 2년, 10년... 평생을 부지런히 일하면 누구나 크나큰 발전을 볼 수 있다.”

     

    아산 정주영 고 현대그룹 회장은 평생 근검과 절약을 삶의 신조로 삼고 일했다.

     

    그는 새벽 3~4시면 어김 없이 일어나 ‘왜 이리 해가 안뜨냐’고 푸념하곤 했다. 새벽 5시마다 현 정몽구 현대차 회장, 정몽준 국회의원 등 동생, 자녀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그날의 할 일들을 지시하고는 6시쯤 함께 청운동에서 계동 현대사옥까지 도보로 출근했다.

     

  • 아산의 아침식탁과 출근. 고 정주영 회장은 매일 새벽 5시에 자제들과 함께 식사한 후 도보로 청운동에서 계동 현대사옥까지 출근했다.ⓒ
    ▲ 아산의 아침식탁과 출근. 고 정주영 회장은 매일 새벽 5시에 자제들과 함께 식사한 후 도보로 청운동에서 계동 현대사옥까지 출근했다.ⓒ

    정주영은 새벽 출근 소감을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 소풍 가는 기분으로 출근한다’고 말하곤 했다. 골치 아픈 일이 산적한 날도 많았겠지만, 항상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했던 것이다.

     

    ‘왕회장’이라고 불릴만큼 막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그였지만, 삶은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현저동 산꼭대기 셋방에서 신당동, 신설동을 거쳐 인왕산 아래 지은 청운동 새 집에 정착한 아산은 가족들에게 종종 “옛날 쌀가게 시절 남의 집의 좁은 방에서, 엉덩이와 무릎이 구멍 난 옷을 누벼 입고 살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큰 호사인가”라고 말했다.

     

    생전 그의 청운동 집 거실에는 '금성(GoldStar)' 상표의 20년 된 낡은 TV와 닳고 닳은 책장 등 살림살이 만으로 보면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 불과했다. 

     

    정주영은 평소 백화점 등에서는 팔지 않는 두터운 양말만 신었기 때문에 항상 남대문에 가서 양말을 사와야 했다. 구두 밑창은 몇 번을 고쳐서 신고, 와이셔츠는 깃, 소매 등을 기워서 입었다.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배가 부르는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연기로 날려버리는데 돈을 쓰느냐고 말하곤 했다. 젊은 시절부터 구두 닳는 것을 늦추려고 징을 박아 신고 다녔다. 옷은 춘추복 한 벌로 입다가 겨울에는 내의를 입고 지냈다.

     

  • 아산은 박정희 대통령이 하사한 '일근천하무난사' 글판을 거실과 사무실에 걸어놓고 되새겼다. ⓒ
    ▲ 아산은 박정희 대통령이 하사한 '일근천하무난사' 글판을 거실과 사무실에 걸어놓고 되새겼다. ⓒ

    그는 청운동 자택과 사무실에 一勤天下無難事(일근천하무난사)라는 글을 나무판에 새겨 걸어놓고 회사가 잘 나갈 때에도 나태해지지 않으려 애썼다. ‘부지런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 뜻의 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준 것으로 회사가 커져 편안해질만할 때면 이 글을 되새기곤 했다.

     

    정 명예회장이 생전 제2의 고향이라는 울산을 방문할 때마다 잠자리로 사용했던 현대중공업 영빈관의 방도 마찬가지였다.

     

    1974년 지어진 사내 영빈관의 맨 위층 3층 복도 끝에 위치한 8평 남짓한 정 회장 방에는 항상 양말과 장갑, 손수건, 겨울용 속옷, 트레이닝복, 오래된 운동화와 세 번 이상 밑창을 바꾼 구두가 준비돼 있었다. 이 방 역시 침대와 10년이 넘은 금성상표의 17인치 소형TV와 120ℓ 소형냉장고, 팔걸이가 해진 1인용 소파 4개가 놓여 있었으며 오늘날 방문객들에게도 공개되고 있다.

     

  • 구두굽에 징을 박고 밑창이 구멍날 때까지 신었던 아산의 구두.ⓒ
    ▲ 구두굽에 징을 박고 밑창이 구멍날 때까지 신었던 아산의 구두.ⓒ

    그는 신문 지상에 ‘개인 소득 랭킹 1위’ 등에 오르기도 했지만, 정작 그의 생활은 중산층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만이 내돈이고 집으로 타가는 생활비만이 내돈이라고 생각했다.

     

    아산은 ‘내가 아니라 회사가 부자’라며 “개인적으로 얼마나 잘 누리고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면서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곤 했다.

     

    자동차도 스텔라, 그라나다, 쏘나타, 그랜저를 타다가 말년에는 다이너스티를 탔는데 측근에게 “나이도 있고 편안한 차를 사용하라고 해서 타고는 있기는 하지만, 너무 좋은 차를 타는게 다른 사람에게 면구스럽다’고 말했다.

     

    ▶넘어져도 ‘신용’ 있으면 재기할 수 있다

     

    정주영은 언젠가 TV에서 한 산골 청년의 인터뷰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직접 소개했다.

     

    “친구 중에 도시에 취직해 월급이 많은 사람도 있는데, 이리 저리 쓰고 10%도 저축을 못한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친구들보다 수입이 절반도 안되지만 매달 절반 이상을 저축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일하면 머지 않아 그 친구들보다 훨씬 잘 살 수 있게 될 거라 믿습니다.” 

     

    인천 부둣가 막노동판부터 바닥 삶을 체험한 그는 직원들이나 외부 강연에서 ‘근검 절약’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 자신이 열 여덟살 때부터 객지로 나와 막노동, 건설현장 돌나르기 등 노동자 시절부터 무섭게 절약생활을 했다. 장작값 10전을 아끼기 위해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저녁 한 때만 불을 지펴 이튿날 아침, 점심 도시락까지 밥을 한꺼번에 짓기도 했다. 정주영은 평생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고 근신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가 특히 중요시 한 것은 ‘신용’이었다.

     

    평소 쌓은 신용을 바탕으로 여러차례 사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정주영은 장사도, 기업도 돈이 있으면 좋고, 돈이 없어도 신용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 아산은 직원들과 틈나는대로 팔씨름도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하는 등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
    ▲ 아산은 직원들과 틈나는대로 팔씨름도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하는 등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

     

    ▶직원들은 먹여살리는 대상이 아니라 ‘동지’

     

    정주영은 회사에서는 종이 한 장도 앞뒷면으로 쓰게 하고, 공사 현장에서 자갈 몇 개가 버려져 있어도 눈물이 빠지게 나무라곤 했다. 하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회사업 등에는 아낌없이 기부금을 내곤 했다.

     

    아산 생존 당시 현대그룹의 직원은 21만명쯤이었다. 한번은 “저 많은 식구들 먹여살리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하는 질문을 받자 “누가 누구를 먹여살린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이 나를 호강시키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사람은 피차 도와가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기회와 시간이 허락하는 한 수많은 기능공들과 어울려 허물없이 팔씨름도 하고 술잔도 나누곤 했다.

     

    언젠가 한 간부가 아산에게 “중역용 엘리베이터를 한 대 놓으시죠”라고 말했다가 면박을 당한 적이 있다. 엘리베이터는 기다리면 탈 차례가 오는 것이고, 혹시라도 젊은 사원이 차례를 양보해 먼저 탈수 있으면 그게 바로 중역용 엘이베이터고, 회장용 엘리베이터지 차별적인 시설을 왜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임직원들이 함께 이루어 만들었으니 근본적으로 다 같은 동지요, 인간적인 차등감을 느끼게 하는 우매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게 정주영의 지론이었다.

     

    현대그룹의 급격한 성장의 바탕에는 아산의 이같은 평등한 직업관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 ▶긍정적 사고가 성공을 부른다

     

    정주영은 한창 잘 먹고 자랄 나이에 점심은 다반사로 굶어가면서, 또 밥보다 죽을 더 많이 먹으면서도 자신의 처지가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해 선생님이 되고 싶은데 10대에 농부로 살아야 하는 현실도 비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피곤한 일 뒤에 단잠을 자고 일어날 때의 거뜬한 기분이 좋았고, 밥맛이 언제나 꿀맛이었던 것을 행복으로 느꼈다.

     

    19세 때 시작한 막노동판에서도 내일은 분명히 오늘보다 발전할 것이고, 모레는 더 한 걸음 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항상 행복하고 활기에 차 있었다.

     

    그는 “현재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꿈으로 언제나 일하는 것을 즐기고, 작은 일에도 행복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특히 500원 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조선소 건설 자금을 빌렸던 데에서도 드러났듯이 정주영은 ‘모든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만이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실패하는 사람은 조금만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비관적으로,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라고 생각하면서 희망을 향해 정진한다고 굳게 믿고 실천했다.

     

    왕회장이 평생 심장에 새겼던 두 단어는 ‘근면’과 ‘된다’ 였던 것이다.

     

    그는 항상 말했다.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일에 부딪쳐서도 어떤 이는 찌푸리고, 어떤 이는 웃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의 빛을 보며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 실패는 없다!”           

     

                                                                                                                          <시리즈 끝>

       


  • [에필로그 / epilogue]
    필자는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왕회장)이 생존해있던 1990년대 중반 한국일보 경제부 기자로서 현대그룹을 출입했었습니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15~20년이 흘렀네요. 현장 기자들끼리 새벽에 왕회장 청운동 자택 앞에서 왕회장 집을 드나드는 자제들이나 CEO들을 인터뷰하려고 취재 경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왕 회장께서 후계 구도를 미리 명확하기 가르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아쉬움이 많습니다. 그가 건재할 때 정몽구 회장, 정몽헌 회장 두 아들을 비롯한 2세들의 경영권을 명확히 했었더라면 현대그룹은 혼란기 없이 더욱 크게 발전했을 것입니다.  

     

    제가 현대그룹을 출입할 때는 이미 그의 기력이 많이 떨어져 말도 힘겹게 알아들을 정도였습니다. 그가 왕성하게 활약했던 젊은 시절 취재를 못했던 것이 안타깝지만, 세기의 경영자가 생존해 있을 당시 그를 가까이서 취재할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산 탄생 100주년을 맞아 왕회장의 도전경영 정신을 소개하고자 현대그룹의 전현직 임원들을 만나고, 또 그의 자서전을 다시 반추하면서 <정주영 도전경영> 시리즈를 게재했는데, 정작 가장 큰 도전과 감명을 받은 사람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언론사 경영을 맡으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이번 시리즈를 쓰면서 크나 큰 힘을 얻었습니다.

     

    흔들리는 글로벌경제에다 국가적으로 저성장이라는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날이야말로 아산의 도전정신이 필요할 때라 생각합니다. 정부나 기업 모두 아산의 도전정신으로 새롭게 무장한다면 우리 모두가 염원하는 국민소득 5만달러 시대도 성큼 앞당겨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