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산책] 삼성기어VR ‘타조’ by 레오 버넷 시카고

오랜 세월 펭귄과 함께 날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에게 놀림거리였던 타조가 마침내 날았다. 모랫바닥에서 뒹굴던 타조를 구름 위까지 날아오르게 한 것은 바로 삼성과 레오 버넷(Leo Burnett) 시카고다. 배경음악으로 영국의 국민가수 엘튼 존의 “로켓 맨”이 사용됐다. 가족과 일상을 벗어나 화성까지 날아간다는 기묘한 가사의 1972년작 노래다. 삼성은 얼마 전 새로 런칭한 마케팅 플랫폼 #할수없는것을하라(#DoWhatYouCant)의 일환으로 이 광고를 집행했다.

타조는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이를 외면하려고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다는 말이 있다. 실은 더운 날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머리를 식히는 것뿐이라니 새의 지능을 무시하는 인간의 편견에서 나온 속설일 뿐이다. 또한 정말로 모래에 머리를 파묻음으로써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으로 타조의 지능을 평가절하해선 안 된다. 우리 인류가 지금 가장 맹렬히 연구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 ‘모래에 머리 파묻기’, 다시 말해 가상현실(VR) 기술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동물인 이상, 인간의 시선이나 시야는 언제나 육체에 의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마침내 인간이 비행기를 만들어 과거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때, 그 비행사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전혀 새로운 시선을 경험한 사람들로 또 우주인들을 빼놓을 수 없다. 38만 킬로미터 떨어진, 대기 한 점 없이 완전히 벌거벗은 달이란 천체에 두 발로 서서 두텁고도 안락한 대기로 둘러싸인 푸른 지구를 바라봤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두 마디로 설명하긴 어렵겠지만, 한 가지는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자신들의 시선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비행술이나 로켓과학이 아니어도 사진술과 촬영술의 발전 덕분에 인간의 시선이 육체를 벗어나기 시작한 지 꽤 오래 됐다. 하지만 기존의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관람자가 새로운 육체를 가진 것처럼 완전히 몰입하기 어렵다. 제 아무리 흥미진진한 스포츠경기를 관람한다 해도, 제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사진을 감상한다 해도 보는 이는 자신이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음을 잊지 않는다.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같은 예술이론은 그 한계를 역으로 이용한 것뿐이다. 

어떻게 보면 예술, 특히 문학과 시각미술은 감상자에게 무엇을 중점적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변천해왔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17세기 서양 고전주의 미술이 너저분한 실제세계의 묘사를 포기하고 이데아적 전형(典刑)을 묘사하려 했다면, 낭만주의 미술은 본질적인 묘사를 포기하고 바라보는 사람의 느낌을 중시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선택적으로 묘사한 건 예술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시선의 공유’, 즉 공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본 것, 혹은 생각한 것을 타인과 완전히 공유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선택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만이라도 제대로 공유하고자 한 것이다. 

디지털 기술 덕분에 인간은 점점 더 많은 ‘시각적 정보’를 공유하게 됐다. 무중력기술과 간단한 4D 기법을 이용한다면 이제 곧 실제 하늘을 나는 것과 거의 흡사한 경험을 가상으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 몰입이 가능한 매체를 개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감각에 의존하는 몰입이다. 삼성의 슬로건처럼 할 수 없는 것을 한다 하더라도, 아직은 우리 오감을 주관하는 ‘매트릭스’ 안에서만 가능하다. 아직은 빨간 약을 먹어야 할까 파란 약을 먹어야 할까 굳이 고민할 때가 아니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