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경제 1일자 오피니언면 '데스크칼럼'에 이 신문 이동주 사회부장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돈과 진실의 공통점. 둘 다 햇볕에 노출되길 꺼린다는 점이다. 

    고위 공직자들이 재산등록을 회피하려 요리조리 꼼수를 쓰고, 부자들이 어떻게든 가진 걸 감추려 든다 해서 나무랄 일만은 아닌 듯하다. 평생을 `빈자(貧者)의 어머니`로 살았던 성녀 테레사조차도 지갑 좀 보여달라 했다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을테니까.

    진실도 마찬가지다. 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앨 고어가 등장한 다큐멘터리에는 왜 하필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이라는 멋쩍은 제목을 붙였을까. 마치 난감한 성적표를 부모님에게 내미는 중학생 같은 송구스러움이 담겨 있다.

    진실은 그렇게 불편한 때가 많다. 물론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감춰선 안 되겠지만 문제는 진실이 항상 모두를 위해 필요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진실게임이 난무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꼬리를 무는 폭로와 해명 속에 한국사회는 온통 난장판이 됐다.

    `폭로의 귀재`들이 득실대는 정치권에서 상대방 대권후보의 과오를 진실게임으로 몰아가는 모습은 5년 전과 흡사하다. 국정감사는 난데없는 국회의원 향응접대 파문으로 엉뚱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검찰 수사도 만만찮다. 변양균ㆍ신정아 씨 사건에 이어 국세청장 상납의혹이 불거지면서 검찰과 국세청은 피의자 진술의 신빙성을 놓고 끝장토론식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삼성에서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낼 호사를 누리다 퇴직한 법조 출신 임원이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을 폭로하는가 하면, 대학 총장 부인이 편입학 대가성돈을 받았다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사회를 뒤덮은 폭로 인플레이션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무엇보다 시기적으로 폭로의 유혹에 이끌리기 딱 좋은 철이다. 정권은 임기 말에 접어들어 휘청거리고, 대선은 코앞에 와 있고, 사회기강은 풀어질 대로 풀어져 있으니 폭로 전문가들에겐 이때다 싶을 것이다.

    인간들이란 늘 자기 진실은 감추면서 남의 진실은 기를 쓰고 알고 싶어한다. 하지만 진실을 진실로 구분해내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진실과 관련해 흔하게 생기는 몇 가지 오류를 보자.

    첫째, 사람들은 사실(facts)과 진실(truth)을 쉽게 혼동한다. 사실은 한 개 행위만으로 성립하지만 그것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려면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반복과 누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느 하룻밤에 달이 뜨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달이 사라졌다고 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주장이다.

    둘째, 모든 진실은 공개되는 것이 옳다는 착각이다. 신정아 씨 누드사진이 각계 반발을 초래한 것처럼 진실에는 공개할 가치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자기 침실과 욕실에 CCTV를 설치할 용기가 없다면 진실을 모조리 다 밝히라고 요구하길 삼가야 한다.

    셋째, 진실은 누구 입에서든 나올 수 있다는 오해다. 진실성이 부족한 사람에게서 제대로 된 진실이 밝혀지는 걸 본 기억이 없다. 가치 있는 진실은 김대업 사건처럼 동네방네 시끄러운 입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앨 고어의 다큐멘터리처럼 송구스럽게 다가온다.

    21세기 한국사회를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할 `불편한 진실`은 우리 모두가 관음증 환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젊은 아가씨 치맛자락을 허락 없이 들춰보는 듯한 재미에 빠져 어느 것이 가치 있는 진실이고, 어느 것이 묻어 둘 진실인지를 혼동해선 안 된다.

    잔인한 폭로가 진실의 탈을 쓰게 된 책임의 상당 부분은 `정의`라는 단어를 남용하는 무리에게 있다. 이들은 폭로 유혹을 극도로 키워 놓은 주범이다. 경제이론에 비춰본다면 폭로를 통해 기대되는 이득의 크기가 혹시 잘못될 때 입을 손실보다 현격하게 높은 한 폭로는 절대로 줄어들지 않는다.

    지난주 한국을 찾은 중국의 문호 왕멍(王蒙)은 필자에게 대가다운 가르침을 주었다.

    "내가 문화혁명 와중에 겪은 고초가 반드시 나 개인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중국은 온갖 혼란, 침략전쟁, 정치사상의 범람 속에서도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내가 겪은 고통은 다른 사람에 비하면 심한 편도 아니다. 먼저 고생하고 나중에 편한 것(先苦後甛)이 더 좋지 않은가."

    때론 사회의 흠집처럼 보이더라도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사는 곳엔 `합리적 무시`가 필요하다. 도무지 양보와 인내를 모르는 폭로꾼들이야말로 사회를 위협하는 `한국판 탈레반`이라고 나는 폭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