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선영서 '추모식' 진행, 이재용 부회장 주관 "'CJ-신세계-한솔' 등 범삼성가 참석…차분한 분위기 진영 재정비"
  •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 ⓒ삼성
    ▲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 ⓒ삼성


    "1938년 40명의 직원과 3만원으로 설립한 삼성상회가 글로벌 100대 브랜드 세계 7위이자 반도체 분야 세계 2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중심에는 대한민국 경제의 토대를 닦은 거인(巨人) 호암 이병철 삼성 선대회장이 있다"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의 29주기가 하루 앞으로 다가오며 호암의 기업가정신이 재조명 받고 있다. 정부의 비대화와 시장규제로 경영환경이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호암의 탈경제적·보국적 정신은 글로벌 경기침제를 돌파할 지침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7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위협요인이 많은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호암의 기업가정신은 대내외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삼성과 대한민국에 재도약의 발판을 제공한다.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난 호암은 1938년 대구에서 청과류와 건어물을 만주와 중국로 수출하는 삼성상회를 설립하며 기업가의 길을 걷게된다.

    호암은 무역의 사업성을 일찌감치 파악해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한다. 호암은 사업 초기 오징어와 한천 등 수출에 주력했지만 국민들을 위한 생필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면사, 재봉틀, 실, 철판, 건설자재 등 국민들의 생활과 한국 산업에 필수적인 수백가지의 제품을 사고파는 일에 집중한다. 호암의 사업보국 정신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간 호암은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했고 환도 후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했다. 무역업으로 큰 돈을 범 호암은 무역에서 나아가 국민들이 직접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제조업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호암은 1953년 본격적으로 제조업에 뛰어든다. 먼저 제일제당을 설립해 국민들에게 수입품의 1/3가격으로 설탕을 공급했고, 1954년 설립된 제일모직을 통해 1/5가격으로 의복을 제공했다. 뒤이어 제분과 비료로 사업을 확장하며 제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갔다.


  • 삼성물산공사 시절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의 모습. ⓒ삼성
    ▲ 삼성물산공사 시절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의 모습. ⓒ삼성


이웅희 한양대 경영대학 교수는 "호암은 무역업을 계속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국가에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제조업에 뛰어들었다"며 "국민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국산으로 대체하기 위한 보국적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완제품을 수입하면 당장 국민의 필요는 채울 수 있지만 귀중한 외화가 소진된다. 특히 생활 필수품을 수입에만 의존할 경우 국가 경제의 자립과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며 "호암은 제조업을 통해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고 기술의 축적과 산업활동 확대를 이룩할 수 있었다. 호암이 강조한 사업보국 경영철학이 바로 이것이었다"라고 강조했다. 

호암의 자서전 '호암자전'을 통해 호암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호암은 "제당설립 불과 2년 만에 나는 거부 칭호를 받았았다"며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했으나 언제나 축재가 목적이기 보다는 신생조국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발전적으로 파악해 기업을 단계적으로 일으켜 갈 때 창조의 기쁨을 가지는 것 같았다"고 제조업에 뛰어는 이유를 설명했다.

호암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성균관대 등을 인수하고 삼성전자, 삼성중공업, 동양방송, 중앙일보사 등을 창설하는 등 명실상부한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전경련의 전신인 전국경제인협회를 창설해 경제활성화에 집중했다.


  •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 ⓒ삼성
    ▲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 ⓒ삼성


    호암은 1987년 11월 19일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호암의 영향력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국내 경제를 이끌고 있는 반도체 사업 역시 호암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74년 이건희 당시 동양방송 이사의 사재로 인수한 한국반도체를 1982년 호암이 본격 지원하며 삼성은 반도체 1등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 1983년 2월 열린 반도체 회의에서 호암은 "반도체 사업을 하기로 확정한다. 어디까지나 국가적 견지에서 우선 삼성이 먼저한다"며 "삼성의 이익만을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한편 올해로 29회를 맞이하는 호암의 추모식은 어김없이 진행됐다. 기일이 토요일인 점을 감안해 추모식은 하루 전인 18일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인근 선영에서 열렸다.

    이재용 부회장의 주관으로 오너 일가와 삼성 사장단이 선영을 참배했고 CJ, 신세계, 한솔 등 범삼성가가 그룹을 나눠 선영을 참배했다. 추모식과 별도로 CJ그룹은 호암의 제사를 필동 CJ인재원에서 치룬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 체제에 돌입한 삼성은 '제3의 창업'을 선언할 정도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지만 국가발전에 기여하라는 호암의 사업보국 정신은 계속될 것"이라며 "산적한 과제에 맞닥드린 삼성이 이병철 선대회장의 추모식 이후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관심이 집중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