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 맞는 인사 찾기 우선"결국 기업 통제 수단될 것" 우려
  • ▲ 장하성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뉴데일리 DB
    ▲ 장하성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뉴데일리 DB


    국민의 노후 자금을 관리하는 국민연금공단이 또다시 외풍에 흔들리고 있다. "외부의 부당한 간섭과 개입을 막아내겠다"던 김성주 이사장의 취임 일성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처지다.

    8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기금이사, CIO)을 뽑는 인사에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 파장이 일고 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 야당들은 일제히 "월권이자 국정농단"이라며 청와대를 향해 맹공을 퍼붓고 있다.

    국민연금 CIO는 국민연금기금 635조원을 운용하는 최고투자책임자로, 주식이나 채권을 포함한 자본시장에서는 '자본시장의 대통령'으로도 불린다.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설립된 1999년 이후 새 CIO를 뽑을 때마다 정권 개입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선임 이후에도 정권이 바뀌면 자리에서 물러나는 아픔을 반복해 왔다. 초대 김선영(2년10개월)부터 2대 조국준(3년), 3대 오성근(2년4개월), 4대 김선정(2년2개월), 5대 이찬우(3년), 6대 홍완선(2년), 7대 강면욱(1년5개월)까지 3년 임기를 모두 채운 CIO는 단 2명에 불과하다. 국민연금 CIO 임기는 기본 2년에 성과에 따라 1년 연임할 수 있다.

    이번 정부 들어서도 국민연금 CIO를 둘러싼 잡음은 계속되고 있다. 8대 CIO를 뽑기 위한 공개모집(공모) 과정에서 탈락한 곽태선 전 베어링자산운용 대표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모 전인 1월30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에게서 지원 권유 전화를 받았다. 청와대 인사수석실에서도 '지원서 작성에 어려운 점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연락해 왔다"고 폭로했다.

    국민연금은 지난 2월 CIO 공모 절차에 돌입했다. 결국 정부가 미리 새 CIO를 점찍은 뒤 형식적으로 공모 절차를 진행했다는 얘기가 된다. 

    곽 전 대표는 또 "김성주 이사장이 '저와 장하성 실장님은 곽 사장님을 계속 밀었다'고 했다"면서 "위에서 지시가 있어 내가 탈락할 것을 알려줬다"고 했다.

    16명이 응모한 이번 CIO 공모에서 곽 전 대표는 면접 등을 거쳐 1등으로 최종 후보 3인에 들었다. 하지만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인사 검증 과정에서 결국 고배를 마셔야 했다. 국민연금 기금이사추천위원회는 지난달 27일 곽 전 대표에게 탈락 사실을 공식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곽 전 대표의 폭로가 나오자 김성주 이사장이 곧장 "인사권자는 자신"이라며 진화하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의혹은 갈수록 커지는  모양새다. 정치권에서는 인사 개입을 넘어 직권 남용으로까지 논란이 번지고 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한국당) 대표 권한대행은 9일 "윗선에서 탈락 지시가 있었다는 폭로까지 나온 마당에 더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해서는 안 된다"며 "더 심각한 것은 청와대의 거짓말"이라고 꼬집었다.

    앞서 청와대는 곽 전 대표의 폭로가 나오자 "추천이 아니라 덕담으로 전화한 것"이라고 해명했다가 추가 반박이 나오자 "권유한 것은 맞다"고 다시 입장을 바꿨다.

    한국당 김승희 의원도 비판에 가세했다. 김 의원은 "청와대 내부 권력투쟁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며 "청와대는 이번 인사개입에 장하성 실장의 윗선이 누구였는지, 문재인 정부가 장하성 실장과 김성주 이사장이 내정한 곽태선 전 대표를 코드에 맞지 않아 병역기준을 빌미로 탈락시킨 것은 아닌지 국민 앞에 밝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특정인사에게 지원하라고 한 것도 문제고, 별다른 이유 없이 내정이 철회된 것도 또 다른 코드 인사로 의심된다"면서 "청와대의 기금운영본부 인사개입이 과거 박근혜 정권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라고 질타했다.

    그러자 청와대는 이날 조국 민정수석비서관 명의로 보도자료를 내고 "보건복지부 장관의 요청에 대한 행정응원으로 적법한 법적 근거를 갖고 있다"며 반박에 나섰다.

    국민연금 CIO 후보에 대한 승인권은 복지부 장관에게 있지만, 인사검증에 한계가 있는 만큼 복지부 장관 요청에 따라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나서 검증을 실시했다는 얘기다. 실제 복지부는 곽 후보의 인사검증 서류를 청와대에 송부해 행정응원을 요청하는 절차를 갖췄다. 행정응원은 타 행정관청의 직무수행 협조 요청에 응하는 것을 말한다.

    조 수석은 또 "곽 전 대표에 대한 청와대의 인사검증은 복지부 장관에 대한 대통령의 행정감독권 행사이기도 하다"며 "복지부 장관의 처분에는 CIO 후보에 대한 승인이 포함되는 것으로, 대통령은 복지부 장관의 승인 처분에 대한 감독 및 취소권 행사 방법으로 CIO 후보에 대한 적격성을 조사할 수 있다"고 했다.

  • ▲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전경. ⓒ뉴데일리DB
    ▲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전경. ⓒ뉴데일리DB

    이처럼 CIO 인선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하면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정권이 기업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가 '충직한 집사(스튜어드·steward)'처럼 주식을 가진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행동 지침을 일컫는 말이다. 국민연금은 이르면 이달 말 도입할 계획이다.

    문제는 이번 CIO 인선 논란이 보여주 듯 아직도 국민연금이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정부의 입맛대로 기금 운용 방향 결정하고 기업의 경영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독립적으로 기금 운용이 이뤄지는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국민연금 내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의 위원장을 복지부 장관이 맡으면서 공단 이사장도 임명하는 구조다.

    현재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 규모는 127조원으로,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국내 상장사만 300여곳에 달한다. 삼성전자(9.9%), 현대차(8.02%), SK하이닉스(10%), 포스코(10.82%), 기아차(7.08%) 등 국내 주요 기업의 1·2대 주주로 올라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사실상 정부에 종속돼 있는 상황에서 배치되는 의견을 내놓기는 힘들지 않을까 한다"며 "정부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를 이사회에서 배제하거나 친정부 인사를 선임하는 식으로 정부 입김을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