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전 확장 공사, 정유화학 플랜트 등 2차 제재시 착공 '무산' 가능성작년 국내 건설사 수주액 '52억달러'… "단일 국가 기준 최대 규모 놓칠 판"
  • ▲ GS건설이 시공한 이란 사우스파 9·10단계 전경. ⓒGS건설
    ▲ GS건설이 시공한 이란 사우스파 9·10단계 전경. ⓒGS건설

    미국의 이란 정부에 대한 제재를 재가동하면서 건설업계의 이란 시장 진출이 사실상 봉쇄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대림산업에 이어 기수주한 물량들이 착공될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8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은 7일(현지시각) 이란 정부의 달러화 매입을 금지하고 이란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개인을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개시했다. 글로벌 기축통화인 달러화 거래를 막아 이란 정권의 돈줄을 옥죄고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고립시키겠다는 취지다.

    미국 정부는 또 오는 11월4일까지 동맹국들에게 이란산 원유 수입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AP통신은 6일 "미국이 한국과 인도 등 동맹국에 2단계 제재가 시작되는 11월5일 이전에 이란산 석유 수입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5월 트럼프 정부는 전임 오바마 정부가 체결한 이란 핵 합의에서 탈퇴하면서 이란 제재 재개를 예고한 바 있다.

    미국의 이란 제재는 2단계에 걸쳐 이뤄진다. 이날부터 발효된 1단계 제재는 이란과 금·귀금속·알루미늄·철·석탄·자동차 거래 등을 한 기업과 개인을 제재할 수 있도록 했다.

    11월 5일부터 시작될 2단계 제재는 좀 더 강력하다. 이란과 석유 제품을 거래하거나 이란의 선박을 이용하면 제재 대상이 된다. 이란중앙은행과의 거래도 금지된다. 이란과 거래하는 제3국의 기업과 개인에 대한 제재를 통해 돈줄을 말리고 단계적으로 제재 수위를 높여 이란 정권의 생명선인 원유 수출까지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1차 제재의 경우 우리나라에 직접적 영향은 없지만 2차 제재는 석유제품과 에너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이를 수입해 사용하는 국내 정유·석유화학 업체들은 직·간접적 피해가 예상된다.

    건설업계 역시 이 같은 석유제품 에너지와 관련된 대규모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가 잇따라 좌초되면서 이미 악영향이 가시화된 모양새다.

    국내 건설기업이 지난해 이란건설 시장에서 수주한 공사액은 모두 52억달러로, 단일 규모로 최대 규모였다. 2위인 인도 29억달러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등 수니파 국가들의 이란 적대 정책으로 인해 지역 내 갈등이 심화되면서 올해부터 일감이 끊어져 수주실적 0건을 기록 중이다.

    앞서 지난 6월에는 대림산업이 지난해 이란에서 수주한 2조2000억원 규모의 정유 플랜트 공사 계약을 해지한 바 있다. 미국이 이란에 달러 결제나 송금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정해진 기한까지 금융조달이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대림산업 측은 "해지된 아스파한 정유공장을 비롯해 3건 모두 착공 전 금융조달 단계인 만큼 공사비를 못 받는 등의 실질적인 피해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이란이 지난해 국내 건설사 최대 수주국이었기 때문에 앞으로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현대엔지니어링은 현대건설과 함께 지난해 3월 3조8000억원 규모의 사우스파 12구역 가스전 확장공사를 수주했고, SK건설은 지난해 8월 타브리즈 정유공장 현대화 사업에 대한 기본계약을 1조7000억원에 따냈지만 아직 금융조달이 성사되지 못해 첫 삽조차 뜨지 못하고 있다.

    건설사들은 아직 공사 초기 단계인 만큼 금전적인 손실이 크지 않지만 수조원에 달하는 프로젝트가 무산되면 향후 수주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현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현대ENG 관계자는 "공사를 준비하던 기간에 미국의 핵 협정 탈퇴가 이뤄진 것이어서 지금까지 투입된 자금은 없다"며 "계약은 아직 살아있으니 우선 11월4일 제재 유예 시점까지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란 건설시장의 전망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미국의 이란 제재가 본격화되면 가뜩이나 힘들었던 금융조달이 더 어려워져 이란에서는 공사를 수주하더라도 착공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국내 건설사들은 공적수출신용기관인 한국수출입은행과 한국무역보험공사의 지원을 받아 사업비 상당 부분을 조달하는데, 미국의 이란 제재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수은이나 무보가 대규모 사업을 단독으로 지원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해외건설협회 관계자는 "이란 기업의 금융조달이 더욱 어려워지는 만큼 앞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게 더 어려워질 것"이라며 "건설기업들도 당장의 수익성보다는 이란시장에서의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자금 조달 부담이 작은 소규모 프로젝트 수주를 타진한다든지, 최근 성장세가 큰 아시아 건설시장에 집중하는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란 건설시장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들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다.

    중동지역 경제지 MEED에 따르면 프랑스의 오일메이저 기업인 Total이 수행할 예정이었던 48억달러 규모의 사우스파 11단계 사업을 접고 철수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Total은 2015년 핵 협정에 따라 이란 에너지 부문에 투자 협약을 체결한 유일한 서방 기업으로, 지난 7월 중국의 CNPC, 이란의 국영기업 Petro pars와 함께 사우스파 11단계 해상유전 개발 프로젝트 파트너 계약에 서명한 바 있다.

    이란 최대 시공사인 Khatam al-Anbiya Construction이 참여하고 있는 South Yaran 유전 개발사업도 어려움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