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칼·대한항공에 사상 첫 주주권 행사 가능성 높아져재계·전문가들, 경영활동 위축 및 행동주의 펀드 조장 지적
  • ▲ 지난 16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연합뉴스
    ▲ 지난 16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연합뉴스

    국민의 노후자금을 맡아서 운영하는 국민연금이 개별기업 경영에 간섭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재계와 학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정부가 기업의 자율경영을 훼손하는 것으로, 이른바 '연금사회주의'로 흘러가고 있어서다. 정상적인 기업활동이 위축될 뿐만 아니라 위헌 소지가 있고 정치논리로 악용될 수 있어 후폭풍이 거셀 것으로 전망된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지난 16일 회의를 열고 한진칼과 대한항공에 대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 여부를 논의, 사실상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첫 주주권 행사를 예고했다.

    회의 결과 전반적으로 수탁자전문위에 전문적인 검토를 요청하자는 의견이 많아, 수탁자전문위 검토 결과를 토대로 기금운용위원회를 다시 열어 2월초까지 주주권 행사 여부와 범위를 최종 결정하기로 했다. 한진칼과 대한항공의 정기주주총회가 3월에 열리는 것을 감안해 주총 6주일 전에 주주제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국민연금이 3월 주총에서 임기가 만료되는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지난해 7월 보건복지부가 의결한 국민연금기금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 즉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업 임원의 선임·해임 또는 직무의 정지 등 경영참여 주주권을 시행할 수 있도록 했다. 한진칼과 대한항공은 정부가 합법적으로 기업경영에 간섭하는 첫 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진그룹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렵고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다. 사외이사나 감사위원 교체 정도는 국민연금 의견에 동의할 수 있지만, 조 회장의 이사 선임 반대는 사실상 경영권을 빼앗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한진칼 지분 7.34%를 보유한 3대주주이고, 대한항공 지분 12.45%를 갖고 있는 2대주주이다.

    재계와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에 대해 여러가지 측면에서 문제점을 지적했다. 공통적으로는 기업에 부담이 되고 정상적인 경영활동이 위축될 것이란 부정적 견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국내 주식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이 주주권행사에 적극 나설 경우 기업들에게 상당한 부담”이라며 “국민연금은 수탁자 책임원칙에 의거해 과도하게 경영활동에 개입하거나 시장을 교란시키지 않도록 공정하고 투명하게 운영돼야 한다”고 밝혔다.

    최완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기업의 정상적 경영활동까지 위축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미국만 하더라도 차등의결권을 통해 창업주의 안정적인 경영권을 보장하면서 고용과 투자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금사회주의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기금운용위원장을 맡고 기금운용본부장도 정부가 검증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은 재벌개혁을 위한 관치로 이어져 연금사회주의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에 투자하는 금액은 123조9000여억원에 달한다. 국내 증시의 8%를 차지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기업이 국민연금의 투자를 받고 있다. 자칫 정부가 국민연금의 손을 빌어 개별 기업들을 대놓고 압박할 수 있는 셈이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행동주의 펀드 움직임에 편승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한진칼을 노리는 사모펀드인 KCGI는 그레이스홀딩스를 통해 한진칼 지분을 10.71% 보유 중이다. 여기에 한진칼 지분은 7.34%을 보유한 국민연금까지 가세할 경우 경제계의 혼란은 더욱 커질 수 있다. 국민의 노후자금이 일개 사모펀드의 이익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행동주의 펀드는 주로 자사주 매입, 배당 등 주식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단기적 성과만 극대화하려고 한다”며 “기업 경쟁력 강화 등 장기적 성장에는 도움이 안된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정치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황인학 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이 도입한 스튜어드십 코드는 공적연금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국민연금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최고의결기구인 기금운영위원회 위원장이 복지부 장관이라는 점에서 독립성 확보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인 투자자로부터 ISD 소송을 당해 국제 소송전으로 비회돨 위험도 있다”고 덧붙였다.

    위헌 소지 가능성도 제기됐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연금법 제102조 2항에서 국민연금이 최대수익을 획득하도록 운영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사회적 가치를 위해 손실을 야기할 수 있는 개입을 하는 것은 불법이다”라고 주장했다.

    2025년에는 국민연금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9%를 차지하게 될 전망에서 국민연금의 개입은 사회주의 경제 체제랑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이 민간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헌법 제 126조에 위반될 소지가 있다”며 “국방상 또는 국민경제상 긴절한 경우에만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하고, 그 이외의 경우에는 위탁운용사에 의결권을 위임하도록 돼 있다”고 말했다.

    한편, 수탁자전문위는 교수, 회계사, 변호사 등의 민간전문가 14명으로 구성됐으며, 지난해 7월 국민연금에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서 기존 의결권전문위를 확대 개편한 조직이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결정하는 수탁자전문위(수탁자전문책임위원회) 위원 14명 중 9명이 정부 산하 연구기관 추천이나 노동계 인사로 구성돼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