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이보, 850여개 대포통장 경찰 제보 코넥스·골드만삭스 사칭 계좌주 동일, 수사 탄력 기대투자사기 계좌지급정지 대상 제외, 골든타임 놓쳐김용민 의원 "계좌지급정지 범위 확대 필요"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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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종 금융사기 수법이 나날이 고도화되며 법적 제도망을 피해 활개치고 있다. 리딩방 등 투자 사기 피해 사례가 속출하고 있는 가운데 계좌 지급정지 범위 확대 등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긴급 계좌 지급정지가 가능한 보이스피싱 경우와 달리 투자를 가장한 사기는 현행법상 구제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피해금액만 수백억원대를 훌쩍 넘기면서 경찰 수사가 본격화된 가운데 범행 의심 계좌에 대한 추가 제보로 향후 수사 방향과 속도에 관심이 쏠린다. 

    28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법무법인 이보는 지난 17일 연계계좌를 포함해 850여개의 대포통장 정보가 담긴 USB를 서초경찰서 경제범죄수사팀에 전달했다. 

    이보 측은 “신원 불명의 공익 제보자로부터 자료를 받아 분석하는 과정에서 대포통장 사기 사건에 연루된 계좌라는 것을 확인했다”며 “자료가 워낙 방대하고 사안이 큰 만큼 재차 검토 후 경찰청 이관 수순을 밟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전했다. 

    해당 USB에는 공인인증서와 계좌주에 대한 정보가 수록됐다. 작년 말부터 올해 9월 기준으로 이들 피해 계좌를 오간 금액은 수천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한 계좌에서만 무려 600억원이 거래된 정황도 포착됐다. 이보는 USB에 담긴 공인인증서 사용 절차와 비밀번호, 은행 공식 홈페이지에 로그인 되는 장면 등 자료에 대한 해석 방법까지 구체화시켜 경찰에 제출했다. 

    이번 대포통장 제보는 ‘가짜 파생상품 거래소’와 외국계 증권사 ‘골드만삭스 사칭’ 사건과 무관치 않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가짜 파생상품 거래소는 한국거래소가 운영하는 코넥스를 사칭했으며, 골드만삭스 사기는 신한금융투자, 키움증권 등 제도권 금융투자회사의 명칭까지 줄줄이 도용해 사기 행각을 벌인 사건이다. 

    이보가 코넥스와 골드만삭스 투자 사기 피해자들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피해금액이 입금된 통장 계좌주가 ‘OO전자통신’으로 모두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계좌 명의가 같다는 것은 이른바 ‘장집’이라 불리는 대포통장 유통책이 일치한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사기 수법이 같은 점도 이 같은 해석을 뒷받침한다. 먼저 주식 리딩 문자로 접근해 상한가 종목을 추천해 준다며 사칭 사이트에 유인한다. 추천 아이디를 통해 회원가입 절차를 마치면 ‘비트코인 파생상품’ 등에 투자하라고 속여 돈을 가로채는 수법이다. 

    골드만삭스 사칭 사건 피해자 A씨는 “가입 초반 투자금으로 소액을 벌자 출금을 유도해 안정적인 투자 방식이라는 점을 인지시켰다”며 “투자 손실이 발생할 경우 원금 회복과 개인 리딩을 해주겠다며 투자금 추가 입금을 강요했다”고 밝혔다. 

    이재욱 법무법인 이보 변호사는 “장집으로부터 같은 명의로 된 계좌를 공급받았기 때문에 동일한 업체로 추정된다. 실제 하나의 법인(페이퍼 컴퍼니)에서 통장이 최대 50개까지 나온다”며 “계좌에서 돈이 오간 흐름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에 대포통장 정보 공개 시 경찰 수사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 골드만삭스 사칭 페이지 캡처. 현재 사이트는 폐쇄된 상태.ⓒ
    ▲ 골드만삭스 사칭 페이지 캡처. 현재 사이트는 폐쇄된 상태.ⓒ
    이처럼 신종 금융사기 피해자들이 속출하는 것은 보이스피싱 사기와 달리 피해방지 골든타임을 확보할 수 있는 규제조차 없기 때문이다. 

    현행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범죄에 한해 피해계좌 지급정지가 가능하다. 그러나 주식 리딩방 사기와 같이 투자 사기는 계좌지급정지 의무화 대상에서 제외된다. 

    신종 금융사기 관련 피해자 구제가 어려운 데다 지급정지 못한 대포통장이 범죄에 재사용되는 것은 더 큰 문제로 지적된다. 예를 들어 범죄 조직이 은행에서 대면으로 돈을 꺼낼 수 없기 때문에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이용해 일정 금액을 인출한다. 그 이상의 금액은 다른 계좌로 이체하거나 다른 피해금액이 입금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처럼 법망의 허점을 활용한 신종 금융사기가 활개를 치고 있는 셈이다. 

    피해방지 골든타임을 놓친 피해자들을 상대로 한 2차 사기 범죄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집단 소송을 유인하거나 피해액을 되찾아주겠다고 접근해 돈을 뜯어내는 수법이다. 

    일각에서는 리딩방 사기가 아닌 보이스피싱을 당했다고 신고해 계좌지급정지를 요청한 사례도 나온다. 이들 피해자는 유일한 계좌동결 방법이라고 판단해 허위 신고를 감행한 것이다. 이를 악용할 경우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의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역으로 불법 사이트를 공격하면서 통장협박을 서슴지않는 피해자도 있다. 본인이 직접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의심 계좌를 무분별하게 지급정지한 뒤 합의금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규제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들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 변호사는 “보이스피싱 사기 범죄가 근절되지 않는 상황에서 최근 SNS계정, 오픈카톡방, 도용된 정보를 기반으로 한 신종 금융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결국 시대가 변하면서 기망행위의 수단이 바뀐 것”이라며 “보이스피싱만 계좌를 정지할 게 아니라 대상 범위를 확대하거나, 다양한 금융사기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이 요구된다”고 전했다. 

    현재 투자를 가장한 사기 역시 전기통신금융사기의 범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해당 상임위에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 김용민 의원은 지난 3월 24일 사이버상에서 발생하는 투자사기의 방지·구제가 가능하도록 하는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김 의원은 “기존 보이스피싱이 사람들의 공포심이나 불안을 이용했다면, 투자를 가장한 사기는 일반 국민들이 금융상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점을 이용한 보다 지능화된 수법”이라며 “투자 가장 사기 역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전기통신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기존 보이스피싱과 실질이 같음에도 현행법상 전기통신금융사기의 범위에 포함돼 있지 않아, 피해자들이 금융기관에 지급정지 등을 요청해도 구제를 받기 힘들었다”고 짚었다. 

    이에 투자 가장 사기도 전기통신금융사기의 범위에 포함시켜 국민들의 피해를 방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 의원은 “신종 금융사기는 보이스피싱과 달리 계좌지급정지가 이뤄지지 않아 사기범들의 계좌가 그대로 운영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며 “신종 금융사기에 따른 피해가 빠르게 늘고 있는 만큼 피해계좌 지급정지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신종 금융사기 범죄조직을 대상으로 강제 수사를 하거나 계좌를 추적할 수 있는 법률적 권한이 없다”며 “법 개정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피해 사례에 대해 경찰 수사 요청 등 권한을 갖고 있는 유관기관과의 공조가 최선”이라고 전했다.

    한편 계좌지급정지 대상 확대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국회 전문위원 보고서에 따르면 투자 자문·일임 사기를 전기통신금융사기의 범위에 포함할 경우 피해자의 일방 주장에 의한 지급정지가 빈번히 발생할 수 있어 선의의 계좌 명의인의 재산권 행사에 과도한 제한을 초래할 수 있다.

    금융위원회는 “실시간으로 송금·이체 행위가 이뤄지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금융 환경에 기인한 민사 특별절차임을 감안할 때 지극히 예외적인 적용이 필요하므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