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류 공급 구조상 보름 뒤에나 체감국제유가 고공행진 지속… 효과 상쇄될 듯탄소중립 역행-인하 종료시 정유사만 비난 우려
  • 주유. ⓒ정상윤 기자
    ▲ 주유. ⓒ정상윤 기자
    정부가 물가 안정을 위해 유류세를 역대 최고 수준인 20%까지 인하하기로 했다. 다만 정부 전망보다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인하 시점은 다음달 12일부터지만, 실제 효과를 체감하기까지는 시일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하는 데다 고유가가 지속될 경우 효과가 상쇄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전날 '제47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에서 다음달 12일부터 유류세를 20% 인하하기로 했다. 기간은 내년 4월까지 6개월가량이다.

    이번 유류세 인하는 2018년 15% 감면 조치에 이은 역대 최대 인하 폭이다. 당초 역대 최대였던 15% 인하 수준으로 검토되고 있었는데, 당정 협의 과정에서 당이 20% 인하안을 정부에 제시했고, 정부가 이를 수용하면서 이뤄진 조치다.

    이에 따라 휘발유 가격은 ℓ당 최대 164원, 경유는 116원, LPG 부탄은 40원까지 각각 인하된다.

    이번 유류세 인하는 최근 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까지 상승하고 국내 기름값도 휘발유 기준 ℓ당 1700원을 넘어서면서 물가 안정 문제가 최우선 민생 정책 과제로 떠오른 데 따른 조치다.

    한국석유공사 오피넷을 보면 26일 기준 전국 주유소에서 판매되는 휘발유 평균 가격은 ℓ당 1762원으로, 전날보다 4.22원 상승했다. 서울 지역 평균 휘발유 가격은 1838원으로, 전일대비 3.36원 올랐다.

    휘발유 평균 가격은 14일부터 전국 평균 1700원을 넘어선 이후 계속 상승하고 있다. 1700원을 넘어선 것은 2014년 말 이후 7년 만이다.

    정부는 이번 인하 조치로 향후 6개월 동안 유류세 부담 경감 규모가 모두 2조5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소비자들이 인하 효과를 체감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소요될 전망이다. 유류세는 휘발유, 경유 등 석유제품이 정유공장에서 출고되자마자 부과되기 때문에 현재 주유소 저장시설에 보관된 기존 휘발유에는 이미 세금이 포함돼 있다.

    결국 주유소 입장에서는 유류세 인하가 시행되더라도 이전에 세금을 다 내고 매입했던 저장분은 기존 가격대로 팔아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2018년 유류세를 15% 인하했을 당시에도 정부가 예상했던 123원의 인하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열흘이 걸렸다. 2018년 11월6일부터 2019년 5월6일까지 15%, 이후 8월까지는 7% 인하했다.

    그 해 11월5일 ℓ당 1690원이었던 휘발유 가격은 유류세 인하 조치가 시작된 6일에는 약 35원 떨어진 1665원에 그쳤다. 유류세 인하 전 가격보다 123원 이상 내려간 가격은 열흘 뒤인 11월15일(1565원)이 돼서야 도달할 수 있었다.

    이에 업계에서는 다음달 유류세 인하 조치가 시행되더라도 정부가 밝힌 ℓ당 164원의 인하 효과를 소비자들이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시기는 약 2주 후인 11월 말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유공장에서 주유소까지 유통되는데 통상 2주가량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 경기 성남시 소재 한 주유소. ⓒ연합뉴스
    ▲ 경기 성남시 소재 한 주유소. ⓒ연합뉴스
    최근 유가가 상승세인 점도 유류세 인하 효과가 즉시 나타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가는 보통 국내 가격보다 2주~1개월 선행하는데, 유가가 오르는 만큼 국내 석유제품의 원가가 높아져 유류세 인하 효과를 상쇄하는 것이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현재 유가가 계속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어 내달 역시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며 "내달 유류세를 인하하더라도 유가 상승에 따라 휘발유 가격이 또 오른다면 가격 인하 폭은 작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두바이유의 경우 1일 배럴당 75.68달러에서 26일 83.94달러까지 치솟았다. 이 같은 흐름이 유류세 인하 시행일인 다음달 12일까지 지속하면 그만큼 국내 석유제품 가격에 인상 요인으로 작용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 '국제유가 상승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시사점'을 통해 "당분간 수급 여건 개선이 어려워 내년 1분기까지는 유가가 높은 수준을 기록할 것"이라며 "지정학적 위험이 상승하면 고유가 시대가 장기화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최근 추세가 지속한다면 역사상 세 번째로 배럴당 100달러 시대가 도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에너지경제연구원도 올 들어 계속된 국제 에너지 가격 급등세가 겨울철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2008년 유류세 인하 당시에도 유가가 상승세여서 세금 인하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3~4주 만에 유류세 인하 이전 수준으로 가격이 높아져 정책 실효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2018년에는 다행히 유류세 인하와 유가 하락이 맞물려 체감 효과가 컸지만, 그래도 정부가 발표한 123원의 인하 효과가 온전히 나타나는 데 열흘이 걸렸다"며 "이번에는 유가가 올랐기 때문에 그보다 더 많이 걸릴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정유업계에서는 정부의 유류세 인하 효과가 시장에 즉시 나타나도록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입장이다. 국내 정유사들은 직영 주유소부터 가격을 내려 판매할 계획이다.

    대한석유협회 측은 "유류세 인하 효과가 빠르게 나타날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할 것"이라며 "효율적인 재고 관리를 통해 국내 수급에 문제가 없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유류세 인하가 종료되는 내년 4월 유가가 고점인 상태라면 국내 정유사들이 석유제품 가격 정상화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이 경우 비난의 화살이 오롯이 정유업계로 향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유류세 인하로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당장은 좋을 것"이라면서도 "유류세를 원상 복귀할 때 유가가 치솟아 있으면 정유사들이 석유제품 가격 인상을 못 하고 부담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정유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유류세 인하 시기가 끝나 석유제품 가격이 다시 인상되면 소비자들의 불만이 쏟아질 수 있다"며 "오히려 유류세를 그대로 적용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유류세 인하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탄소중립 정책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있다. 탄소를 줄이기 위해 석탄, 석유는 물론, LNG 발전까지 줄이겠다고 공언한 상황에서 세금을 인하하면 오히려 불필요한 석유 소비를 더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한편 유류세 인하로 물가 안정을 기대하는 정부와 달리 전문가들은 예상만큼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유류세가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번 인하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33% 끌어내릴 것으로 분석했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세율 인하를 통해 물가를 잡겠다는 발상은 동의하기 어렵다"며 "유가가 전 세계적으로 오르고 있는데 다른 나라에서 유류세 인하를 언급한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