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원전 8기 추가 승인…7년간 원전 64기 늘리며 속도전'3대 메가프로젝트'에 원전 18기 규모 추가 전력 필요한데정부, 신규 원전 또 공론화…"국민 여론에 책임 떠넘겨" 비판전력 공급 지연으로 '골든 타임' 놓치면 AI 패권 경쟁서 밀려나
  • ▲ 고리 원전. ⓒ뉴시스
    ▲ 고리 원전. ⓒ뉴시스
    중국이 최근 인공지능(AI) 시대의 전력 패권을 선점하기 위해 최근 7년간 신규 원전 64기의 건설을 승인했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첨단산업의 급격한 전력 수요 증가에 대비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망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 정부는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규 원전을 반영할지 여부를 다시 여론조사와 공론화 절차에 부치기로 했다. 정부가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 등 3대 메가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도 가장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인 신규 원전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임해 AI 패권 경쟁에서 밀려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10일 중국에너지보 등에 따르면 중국 국무원은 지난달 31일 국무원 상무회의를 열고 4개 프로젝트, 총 8기의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승인했다.

    사업별로는 중국핵공업집단(CNNC)이 추진하는 저장성 진치먼 원전 3·4호기와 랴오닝성 좡허 원전 1·2호기, 중국광핵집단(CGN)의 광둥성 타이핑링 원전 5·6호기, 국가전력투자공사(SPIC)의 산둥성 라이양 원전 1·2호기 등이다.

    이번에 승인된 진치먼 원전 3·4호기와 타이핑링 원전 5·6호기에는 중국이 독자 개발한 3세대 원전인 '화룽 1호 2.0'이 처음으로 대규모 적용된다. 화룽 1호 2.0은 부품 규격을 통일하고 설계 표준화와 건설 공정 단순화를 추진해 기존 원전보다 건설비용과 공사 기간을 줄인 것이 특징이다.

    라이양 원전 1·2호기에는 중국의 또 다른 3세대 원전 기술인 '궈허 1호'가 적용된다. 좡허 원전에는 현재 중국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건설되고 있는 화룽 1호가 채택됐다.

    중국은 2019년 이후 사실상 매년 신규 원전 건설을 승인하고 있다. 연도별 승인 물량은 2019년 6기, 2020년 4기, 2021년 5기, 2022년 10기, 2023년 10기, 2024년 11기, 2025년 10기, 올해 8기다. 2019년 이후 승인된 원전만 모두 64기에 달한다.

    중국 국가핵안전국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현재 중국이 운영 중인 원전도 64기다. 이미 가동 중인 원전 수와 맞먹는 규모의 신규 원전을 최근 7년여 동안 추가로 승인한 셈이다.

    중국은 2030년까지 원전 설비용량을 110GW(기가와트)로 확대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원전 국가로 올라선다는 목표를 세웠다. 원전을 탄소중립을 위한 발전원에 그치지 않고 AI와 반도체 등 첨단산업 경쟁력, 에너지 안보를 동시에 뒷받침하는 국가 전략 인프라로 판단한 것이다.

    중국은 태양광과 풍력 설비에서도 세계 최대 규모를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발전량이 달라지는 재생에너지만으로는 24시간 중단 없이 가동해야 하는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어렵다고 보고 원전을 함께 확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중국과 대조적이다. 정부는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규 원전을 얼마나 반영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여론조사와 대국민 토론 등 공론화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지난 3일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신규 원전 반영 문제에 대해 "국민 정서상 가치 논쟁적 성격도 있어 국민 여론과 실현 가능성을 최대한 투명하게 다루겠다"고 밝혔다.

    김 장관은 "여러 차례의 여론조사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같은 사실을 놓고 논쟁이 많은 만큼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국민 의견도 수렴해 정부안을 확정하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앞서 11차 전기본에 반영된 신규 대형 원전 2기를 놓고도 지난 1월 리얼미터와 한국갤럽에 의뢰해 대국민 수용성 조사를 실시했다. 이미 확정된 국가 전력계획을 다시 여론조사 대상으로 삼으면서 원전 부지 선정과 후속 절차가 지연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당시 조사에서는 신규 원전 건설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반대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후 신규 대형 원전 2기 건설 부지로 경북 영덕군이, 700MW급 소형모듈원전(SMR) 부지로 부산 기장군이 각각 선정됐다.

    정부가 12차 전기본을 수립하면서 신규 원전 반영 여부를 또다시 여론조사에 부치기로 하자 에너지 업계에서는 정책 결정이 장기간 표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형 원전은 부지 선정과 인허가, 건설을 거쳐 상업운전에 들어가기까지 통상 10년 이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가 추진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의 추가 전력 수요는 기존 전력망과 발전설비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다.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팹 4기를 유치하기로 한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약 6.3GW의 추가 전력이 필요하다. 전국 AI 데이터센터의 추가 전력 수요는 약 18.4GW로 추산된다. 두 사업에 필요한 전력만 총 24.7GW에 달한다.

    이는 설비용량 1.4GW인 한국형 대형 원전 APR1400 약 18기에 해당하는 규모다. 원전은 실제 발전량을 결정하는 이용률이 80%를 웃도는 반면 국내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평균 이용률이 15% 안팎에 그친다. 재생에너지는 동일한 설비용량을 갖추더라도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실제 발전량이 크게 달라져 별도의 저장장치와 송전망, 예비 발전설비가 필요하다.

    김 장관도 최근 라디오 인터뷰에서 "반도체는 24시간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해야 하는데 재생에너지가 늘어나는 양만으로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다"며 원전 확대 필요성을 인정했었다. 

    그는 신규 부지 확보에 따른 갈등을 줄이기 위해 전남 영광 한빛원전과 울산 새울원전 등 기존 원전 부지 안에 원전을 추가 건설할 수 있다는 입장도 밝혔다. 그러나 정부가 신규 원전 규모와 건설 여부를 국민 여론에 다시 맡기기로 하면서 실제 사업 추진 여부와 일정은 불투명한 상태다.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설 호남 지역의 반원전 여론도 변수다. 지난 1월 정부가 실시한 조사에서 광주·전라는 전국에서 원전에 가장 부정적인 지역으로 나타났다.

    리얼미터 조사에서 광주·전라 응답자 가운데 원자력을 '가장 확대해야 할 발전원'으로 꼽은 비율은 31.3%로 전국 8개 권역 중 가장 낮았다. 원전이 위험하다는 응답은 43.1%로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원자력을 가장 확대해야 할 발전원으로 꼽은 호남 지역 응답자는 22.3%에 그쳤다.

    한빛원전 7·8호기를 기존 부지에 추가로 건설하거나 기존 원전의 계속운전을 추진할 경우 지역 환경단체와 주민 반발이 본격화할 가능성이 있다. 정부가 공론화 결과에 정책 결정을 의존하면 반도체 클러스터에 필요한 발전설비와 송전망 건설이 함께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전력망 건설에도 통상 5~10년이 걸린다. 정부는 2029년 말까지 서남권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최소 1개씩의 팹을 가동하도록 한다는 목표지만 광주 군공항 이전과 부지 확보, 전력·용수 공급시설 건설이 모두 지연되고 있다.

    원전 건설이 중단되면 국내 원전 산업 생태계와 수출 경쟁력이 약화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국은 자국 내에서 화룽 1호 등 독자 원전을 반복 건설하며 기술을 검증하고 공급망과 전문인력을 확대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국내 신규 원전 발주가 장기간 끊길 경우 기자재 업체와 건설사, 전문인력 유지가 어려워져 해외 원전 수주 경쟁에서도 중국에 밀릴 수 있다.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AI와 반도체 경쟁을 전력 인프라 경쟁으로 보고 원전 건설을 국가 전략 차원에서 밀어붙이고 있다"며 "한국은 첨단산업에 필요한 전력 규모가 이미 구체적으로 제시됐는데도 신규 원전을 지을지 조차 결정을 하지 못하고 국민 여론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생에너지 확대와 원전 건설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면서 첨단산업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려면 신규 원전과 송전망 건설 계획을 조속히 확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