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투자에 추가 팹·소부장 요구·국회는 총수 불러 투자 압박 여부 추궁이재용 12회·최태원 8회 대통령 대면 … 늘어나는 기업인 정치 일정기업 경영 판단까지 관치로 … "이제는 기업이 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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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총수들이 기업을 경영하는 건지,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정치권과 재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두고 한 기업 관계자가 한 말이다. 기업의 투자 결정이 경영 판단을 넘어 정치권의 관심사가 된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실제로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둘러싼 상황은 이런 우려를 키우고 있다.

    인공지능(AI) 확산으로 반도체 산업은 다시 치열한 경쟁에 들어섰다. 미국과 중국은 자국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 투자를 독려하고, 대만과 일본도 생산 기지 유치와 지원책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메모리 시장에서는 슈퍼사이클이 본격화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확보해야 할 생산 능력과 기술 경쟁력의 중요성도 커졌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조금 다른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를 추진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막대한 금액의 투자 유치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지와 전력, 용수, 인력부터 따져야 하는 기업에 투자 지역과 규모를 둘러싼 정치권의 추가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국회도 가세했다. 여야는 호남 반도체 투자 과정에서 정부가 기업에 압박을 가했는지를 따지겠다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증인으로 부르는 청문회를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투자를 요구하고, 국회는 그 투자가 정부 압박에 따른 것이었는지를 묻는 묘한 상황이다.

    대통령과 기업인의 만남도 예외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올해 이재용 회장과 12차례 대면했다. 최태원 회장과의 만남도 8차례에 달한다. 문제는 소통의 횟수가 아니다. 그 소통이 기업의 경영 판단에 어떤 무게로 작용하느냐의 문제다.

    반도체 투자는 다른 산업과 다르다. 공장 하나를 짓는데 수십조원이 들어가고, 전력과 용수 확보부터 고객사와의 거리, 인력 수급, 물류, 생산 효율까지 수많은 변수를 계산해야 한다. 한번 정한 투자 입지를 쉽게 되돌릴 수도 없다.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국가의 목표와 기업의 투자 타당성은 모두 중요하지만 투자 판단과 그에 따른 경영 책임은 오직 기업의 몫이다.

    호남 투자를 둘러싼 논쟁에서 야당이 '관치 경제'를 지적한 것도 이 지점이다. 반도체 투자 입지는 기업이 사업성을 따져 결정할 영역인데 정부가 먼저 특정 지역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것이다. 결국 논쟁의 핵심은 호남에 공장을 짓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정부가 어디까지 기업의 투자 결정에 관여할 수 있느냐에 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기업이 부담해야 할 정책 변수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투자 결정을 내린 뒤 정부가 무엇을 요구할지, 국회에서 어떤 질문을 받을지까지 고려해야 한다면 기업은 반도체 기술과 수율, 고객 확보에 집중할 시간에 또 다른 변수를 계산해야 한다. 대통령 일정과 정부의 투자 요구, 국회의 청문회가 이어지는 것 자체가 기업에는 경영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반도체 호황으로 올해 국세 수입이 2년 전보다 100조원 이상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기업에 추가 투자를 요구하기에 앞서 정부는 전력·용수·인허가·인재 등 투자 병목을 해소하는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경쟁에서 이기면 그 성과는 결국 한국 경제로 돌아온다. 반대로 두 기업이 경쟁사보다 한발 늦으면 그 부담 역시 국가가 함께 떠안게 될 것이다.

    전례 없는 반도체 슈퍼 사이클로 너도 나도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고 있다. K반도체 육성이라는 탈을 쓴 정치권의 요구가 기업의 경영 영역까지 침범하는 순간 관치는 정책 리스크가 된다. 기업이 투자와 기술 경쟁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정책 불확실성을 없애는 것이 지금 정부와 국회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