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권 투자 발표 직후 美 "반도체 공장 안 지으면 관세"삼전닉스 이미 美에 투자 중인데 '이중 투자' 부담 현실화 대만 200억달러 추가 투자에 TSMC 美 투자 2650억달러韓 투자 기준 높아져…삼전닉스 예의주시
  • ▲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일(현지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에서 열린 G20 혁신장관회의에 참석,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일(현지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에서 열린 G20 혁신장관회의에 참석,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서남권에 800조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 계획을 내놓은 직후 미국이 자국 내 생산시설 건설을 관세와 연계해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어 국내와 미국을 동시에 챙겨야 하는 '이중 투자' 부담이 현실화하고 있다. 

    특히 대만 반도체·인공지능(AI) 기업들이 미국에 200억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를 예고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TSMC가 미국 투자 규모를 2650억달러까지 끌어올린 데 이어 대만 공급망 기업들까지 미국행에 가세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 반도체 기업에 요구하는 '투자 눈높이'도 높아질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3일 정부와 통상 업계에 따르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2일(현지시간) CNBC 인터뷰에서 반도체에 '표적화되고 신중하게 설계된 관세 정책'을 도입하겠다며 미국 내 생산시설 투자와 관세 감면을 직접 연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러트닉 장관은 "미국에서 제조시설을 지으면 관세 감면 혜택을 줄 것이고, 짓지 않는다면 세계 최대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관세를 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애리조나주에 대규모 반도체 생산시설을 짓는 대만 TSMC와 미국 마이크론을 사례로 들었다.

    미국 내 생산시설을 늘리는 기업에는 무관세 또는 관세 감면 혜택을 주는 대신 그렇지 않은 기업에는 관세를 부과해 미국 투자를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를 중심으로 37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테일러 첫 번째 파운드리 공장에 이어 올해 말 두 번째 공장 착공도 계획하고 있어 기존 프로젝트를 앞당기거나 추가 투자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여지가 있다.

    상대적으로 고민이 큰 곳은 SK하이닉스다. SK하이닉스는 약 40억달러를 투입해 미국 인디애나주에 HBM 첨단 패키징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있지만 D램 웨이퍼를 생산하는 전공정 팹은 미국에 없다.

    미국이 '메이드 인 USA' 반도체 정책을 메모리 분야까지 확대할 경우 SK하이닉스가 미국 내 전공정 생산시설 투자를 검토해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지난 7월 미국에서 전력과 용수, 인력, 공급망 등 생산 여건이 갖춰진다면 미국에 메모리 생산공장을 건설할 수 있다는 취지로 언급하며 추가 투자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문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국내에서도 전례 없는 규모의 투자를 앞두고 있어 투자 여력이 크지 않다는 점이다.

    정부는 지난 6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서남권에 800조원을 투자해 메모리 반도체 팹 4기를 건설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SK하이닉스 청주 사업장 등 기존 투자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최첨단 반도체 공장 한 곳을 건설하려면 수십조원의 자금은 물론 막대한 전력과 용수, 숙련 인력, 소재·부품·장비 공급망이 필요하다. 미국은 국내보다 건설비와 인건비 등이 높은 만큼 현지 생산 확대가 기업의 원가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에 따라 미국 투자 확대가 곧바로 국내 투자 축소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투자 우선순위와 집행 속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신규 팹 투자가 추가될 경우 국내 팹의 착공이나 장비 반입 시점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전체 설비투자(CAPEX)를 관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반도체 분야 경쟁자인 대만이 대미 투자를 공격적으로 늘리는 것도 부담이다. 반도체 업계 등에 따르면 궁밍신 대만 경제부장은 전날 타이베이에서 열린 반도체 전시회 '세미콘 타이완 2026' 미국관 개막행사에서 대만 기업들이 미국에 200억달러(약 28조원) 규모의 추가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만 경제부가 지난 5월 미국 최대 투자유치 행사인 '2026 셀렉트 USA' 참석 이후 TSMC를 제외한 자국 기업들의 투자 계획을 파악한 결과다. 투자 기업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AI와 반도체 주문 급증을 계기로 미국 투자를 확대하려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도 즉각 환영했다. 미 상무부 반도체혁신투자국의 빌 프라우엔호퍼 사무국장은 대만 기업의 투자가 미국의 핵심 기술 역량을 강화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이 자국 내 반도체 생산 확대를 위해 해외 기업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만이 추가 투자로 화답한 셈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번 발표가 투자 규모 자체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미국의 '비교 기준'을 한 단계 더 높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TSMC는 이미 미국 애리조나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7월 1000억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를 발표하면서 미국 내 총 투자 계획은 2650억달러까지 늘어났다.

    대만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규모는 더욱 커진다. 미국과 대만은 지난 1월 대만 반도체·기술 기업들이 미국에 최소 2500억달러를 직접 투자하고 대만 측이 추가로 2500억달러의 신용보증을 제공하는 내용의 합의를 체결했다. 미국 입장에선 총 5000억달러 이상의 투자를 확보한 셈이다.

    이는 한국이 지난해 미국과 합의한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 패키지와도 성격이 다르다. 한국의 3500억달러는 2000억달러 규모의 전략적 금융투자와 1500억달러 규모의 조선협력 패키지로 구성된다. 반면 대만의 2500억달러는 반도체·첨단기술 기업들의 미국 현지 직접투자 성격이 강하다. 한국은 2000억달러의 전략 분야 투자와 관련해 1호 투자처도 발표하지 못한 상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국 정부가 이미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더라도 1호 투자처를 아직 발표하지 않고 있어 미국이 불만이 큰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만 기업들이 추가 투자에 잇따라 나설수록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 반도체 기업에도 이에 상응하는 투자를 요구할 명분이 커지게 된다"며 "대미 투자 지연으로 인해 우리 기업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정부가 신속하게 미국과의 협상을 마무리해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