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부 "호남 반도체 배치전환은 교섭 대상"재계 "기업 투자와 경영활동 제약할 것" 반발서남권 800조 투자 결정한 삼전닉스 '뒤통수'
  • ▲ 삼성전자에서 비(非) 반도체 분야를 맡는 디바이스경험(DX)부문 중심의 동행노동조합원들이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인근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이들은 DX 부문과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과의 보상 격차가 크다며 기존 임금협상 합의를 백지화하고 직원 1인당 자사주 1000주 지급을 요구 했다. 2026.08.21.  ⓒ뉴시스
    ▲ 삼성전자에서 비(非) 반도체 분야를 맡는 디바이스경험(DX)부문 중심의 동행노동조합원들이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인근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이들은 DX 부문과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과의 보상 격차가 크다며 기존 임금협상 합의를 백지화하고 직원 1인당 자사주 1000주 지급을 요구 했다. 2026.08.21. ⓒ뉴시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정부 요구에 맞춰 서남권에 800조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를 추진하는 가운데 공장 신설에 따른 인력 배치전환이 노조의 의무 교섭 및 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정부 지침이 나오면서 산업계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미국이 반도체 관세를 앞세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현지 공장 투자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대규모 신규 투자에 수반되는 인력 재배치까지 노사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게 되면서 기업들의 부담이 한층 커졌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정부의 지역균형발전 정책에 호응하는 기업들에 새로운 노무 리스크까지 떠안겼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3일 '경영성과급 등 노동쟁의 대상 시행지침안'을 발표했다. 개정 노동조합법, 이른바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노동쟁의 대상 등을 둘러싼 현장 혼란을 줄이기 위해 지난 2월 내놓은 해석지침을 보완한 것이다.

    노동부는 노조가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성과급으로 지급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의무적 교섭이나 조정·쟁의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매출액이나 영업이익, 당기순이익 등 기업 이익에 연동해 성과급을 요구할 경우 국가나 주주 등 제3자의 권익을 침해할 우려가 있고 기업의 경영상 판단을 과도하게 제약할 수 있다는 이유다.

    노동부는 '호남 반도체 공장 신설'과 관련해서는 기업의 투자 결정 자체는 의무 교섭이나 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공장 신설·이전으로 정리해고나 구조조정, 배치전환 등에 관한 인력운영계획이 수립되고 근로조건 변화가 객관적으로 예상되는 단계에 들어가면 해당 사안은 의무적 교섭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기업이 신규 공장을 짓기로 결정하는 것 자체를 노조가 교섭이나 파업을 통해 막을 수는 없지만 실제 공장 가동을 위해 기존 사업장 인력을 옮기는 과정에서는 노사 교섭은 물론 쟁의행위 길까지 열린 것이다. 

    경제계는 즉각 반발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기업 실적에 연동된 성과급 요구를 쟁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교섭 기준을 구체화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배치전환 관련 기준이 기업 투자와 경영활동을 제약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대한상의는 이날 성명을 통해 "공장을 새로 짓거나 옮기고, 사업을 팔거나 신기술을 들이는 결정은 직원 배치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며 "현장에서 이 기준을 넓게 적용할 경우 투자와 경영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한국경제인협회도 "공장 신설, 인공지능(AI) 등 신기술 도입과 같은 고도의 경영상 결정에 수반되는 인력배치 등을 교섭 대상으로 열어둔 부분은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서 기업의 신속한 의사결정과 유연한 대응을 제약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메가 프로젝트나 적기의 사업 재편이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산업에 있어서는, 절차적 불확실성이 실질적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기업투자, 공장·설비의 신설·증설 등에 따른 배치전환은 그 목적과 내용이 기존 근로자의 고용관계를 축소·재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형성되거나 확대된 생산조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구성·배분하는 데 있다"며 "공장 신설과 이로 인한 배치전환 등 기업의 의사결정 사항은 노동쟁의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점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요구에 따라 800조원을 투입해 서남권에 반도체 팹 4기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최첨단 반도체 팹은 생산·공정·장비·품질·연구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숙련된 인력이 필요한 만큼 신규 채용만으로 인력 수요를 모두 충당하기 어렵다. 기존 평택이나 용인, 이천, 청주 사업장의 숙련 인력을 일정 부분 새로운 사업장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노동부 지침에 따라 근무지 변경이나 업무 조정 등이 근로조건 변화로 판단되면 노조가 교섭을 요구할 수 있고 교섭이 결렬될 경우 파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생산 차질은 곧 글로벌 경쟁 구도에서 밀려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특히 정부가 한편으로는 기업들에 지방 투자를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투자에 필수적인 인력 배치에 새로운 노무 리스크를 안겨줬다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공장은 건물과 장비만 있다고 가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숙련된 인력을 적기에 배치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이후 인력 배치 문제까지 노사 교섭의 불확실성에 노출될 경우 투자 일정 관리가 훨씬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의 투자 압박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최근 외국산 반도체에 표적 관세를 부과하고 미국 내 생산시설 투자 규모에 따라 관세를 감면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2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제조시설을 지으면 관세 감면 혜택을 줄 것이고, 짓지 않는다면 세계 최대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관세를 내야 할 것"이라며 현지 생산 확대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를 중심으로 37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투자를 진행 중이고 SK하이닉스도 인디애나주에 약 40억달러를 투입해 고대역폭메모리(HBM) 첨단 패키징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추가 생산시설 건설을 요구할 경우 투자 규모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에서는 관세를 피하기 위해 현지 공장을 더 지으라는 압박을 받고, 국내에서는 정부 요구에 따라 수백조원 규모의 지방 투자를 추진하면서 인력 재배치 과정에서 노사 교섭 리스크까지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며 "정부 정책의 일관성이 떨어지면 메가 프로젝트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업의 신규 투자 결정 이후 그곳에 인력을 재배치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데, 재배치를 노동쟁의 대상으로 인정한 것은 노조에 사실상 투자 거부권을 준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