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치전환 교섭 대상" 호남 반도체 파업 길 터 업계 "인력 확보 막히면 공장 정상 가동 어려워"美는 반도체 표적 관세 무기로 삼전닉스에 투자 압박재계 "국내 투자환경 악화 땐 해외 유출 우려"
  • ▲ 경기 수원시 영통구 삼성전자 수원본사 모습. ⓒ뉴시스
    ▲ 경기 수원시 영통구 삼성전자 수원본사 모습. ⓒ뉴시스
    정부 요구에 맞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호남을 포함한 서남권에 80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 4기를 건설하기로 한 가운데 정부가 공장 신설에 따른 인력 배치전환을 노조의 의무 교섭 대상으로 인정하면서 반도체 업계에서 투자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려면 기존 사업장의 숙련 인력을 신규 사업장으로 옮기는 과정이 불가피한데 배치전환을 둘러싼 노사 갈등이 파업으로 번질 가능성까지 생긴 만큼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해 호남에 생산기지를 건설할 유인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미국이 관세를 앞세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현지 생산시설 확대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국내 투자 여건까지 악화할 경우 기업들이 해외 투자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4일 정부와 반도체 업계 등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전날 '경영성과급 등 노동쟁의 대상 시행지침안'을 발표했다. 개정 노동조합법, 이른바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노동쟁의 대상 등을 둘러싼 혼란이 이어지자 지난 2월 내놓은 해석지침을 보완한 것이다.

    노동부는 '호남 반도체 공장 신설'이라는 투자 결정 자체는 의무 교섭이나 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명확히 했다. 기업이 어디에 얼마를 투자할지 결정하는 것 자체는 경영권의 영역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공장 신설·이전으로 정리해고나 구조조정, 배치전환 등에 관한 인력운영계획이 수립 중이거나 결정된 사실이 확인·공지되고 근로조건 변화가 객관적으로 예상되는 단계에 들어가면 의무적 교섭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기업이 호남에 공장을 짓는 것 자체를 노조가 교섭이나 파업을 통해 저지할 수는 없지만 실제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기존 사업장의 인력을 신규 사업장으로 옮기는 과정에서는 노조가 교섭을 요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후 교섭이 결렬되고 관련 법적 절차를 거칠 경우 쟁의행위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반도체 업계가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정부가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규모 지방 투자를 요청한 상황과 이번 지침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6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호남을 포함한 서남권에 800조원을 투자해 최첨단 메모리 반도체 팹 4기를 건설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생산시설을 비수도권으로 분산해 지역균형발전을 추진하고 새로운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정부 구상에 '반도체 투 톱'이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며 발을 맞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정부는 '경영성과급 등 노동쟁의 대상 시행지침안'을 내놓는 등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대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정부가 한쪽에서는 기업에 막대한 지방 투자를 요청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해당 투자를 실행하는 데 필수적인 인력 배치의 불확실성을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 ▲ 경기도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모습. ⓒ뉴시스
    ▲ 경기도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모습. ⓒ뉴시스
    특히 반도체 산업은 일반 제조업보다 숙련 인력 의존도가 높다. 수백조원을 들여 공장을 완공하더라도 장비를 설치하고 생산수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숙련된 엔지니어를 제때 확보하지 못하면 정상 가동이 어렵다.

    신규 채용만으로 수천명 규모의 전문인력을 단기간에 확보하기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삼성전자의 평택·용인 사업장이나 SK하이닉스의 이천·청주 사업장 등 기존 생산기지에서 공정·장비·품질·연구개발 경험을 갖춘 인력을 일정 부분 옮기는 과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공장을 짓기 위해 필요한 4대 필수 조건은 전력, 용수, 부지, 인력"이라며 "수백조원을 투자해 공장을 지어도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제대로 충족되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산이 어렵고 결국 기업 입장에서는 다른 지역이나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특히 인력 문제는 전력이나 용수와 달리 기업이 돈을 투자한다고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요소로 꼽힌다. 기존 생산기지에서 숙련 인력을 이동시키는 과정이 노사 교섭에 묶이고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공장 완공 시점과 실제 양산 시점 사이에 상당한 공백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반도체는 시장 상황에 맞춰 적기에 생산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인공지능(AI) 시장 확대에 따라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첨단 메모리 수요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공장 가동이 수개월만 늦어져도 고객사 확보와 시장점유율 경쟁에서 밀려나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의 투자 압박까지 동시에 받고 있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외국산 반도체에 표적 관세를 부과하고 미국 내 생산시설 투자 여부에 따라 관세를 감면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지난 2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제조시설을 지으면 관세 감면 혜택을 줄 것이고, 짓지 않는다면 세계 최대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관세를 내야 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삼성전자는 이미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를 중심으로 37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투자를 진행하고 있고 SK하이닉스도 약 40억달러를 투입해 인디애나주에 고대역폭메모리(HBM) 첨단 패키징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관세 감면 조건으로 추가 생산시설을 요구할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미 투자를 더욱 늘려야 할 가능성이 있다. 대만 TSMC가 미국 투자 계획을 2650억달러까지 늘린 것도 한국 기업에는 상당한 압박 요인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결국 국내와 해외 투자 환경의 차이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장기적인 투자 배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할 때 전력·용수·부지·인력뿐 아니라 세제와 보조금, 규제, 노사관계까지 종합적으로 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보조금과 관세 혜택을 앞세워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는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신규 공장 가동을 위한 인력 배치가 노사 갈등으로 번질 가능성이 커질 경우 호남 투자에 대한 기업 내부의 경제성 판단도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기업에 수백조원 규모의 투자를 요청했다면 최소한 기업들이 계획대로 공장을 짓고 가동할 수 있는 여건은 만들어줘야 한다"며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기업으로서는 국내와 해외 가운데 어디에 투자하는 것이 유리한지 다시 계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