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40.6% 책임진 반도체에 국내외 '투자 청구서' 쇄도지역투자·전력망 비용에 美 현지 생산 압박까지 본격화업계 "무차별 투자 요구, 기업 재투자 여력 훼손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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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전자 수원본사. ⓒ뉴시스
한국이 세계 네 번째 '수출 1조달러' 달성을 눈앞에 두게 된 가운데 기록적인 수출 실적을 견인한 반도체 기업들을 향해 국내외의 대규모 투자 요구가 쏟아지고 있다.정부는 지역균형발전을 앞세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호남권 투자를 주문하고 있고, 한국전력은 전력망 구축 비용을 이유로 총 25조원 규모의 전기요금 선납 방안을 제시했다. 미국도 고율 관세를 무기로 현지 반도체 공장 건설을 압박하고 있다.인공지능(AI) 반도체 호황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이 빠르게 개선되자 정부와 공기업, 해외 정부까지 각자의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청구서'를 내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한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투자 우선순위가 정치·정책 논리에 흔들리면 장기 경쟁력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8일 산업통상부와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 5일 오후 1시 기준 올해 누적 수출액은 7094억달러로 집계됐다. 사상 최대였던 지난해 연간 수출액 7093억달러를 불과 248일 만에 넘어선 것이다. 지난해보다 117일 빠른 속도다.정부는 현재 추세가 이어지면 오는 12월 초 연간 수출액이 1조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실화할 경우 한국은 미국과 중국, 독일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연간 수출 1조달러를 달성한 국가가 된다.기록적인 수출을 이끈 일등 공신은 반도체다. 올해 반도체 수출액은 2812억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7배 증가했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40.6%에 달했다. AI 서버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를 포함한 컴퓨터·주변기기 수출도 336억달러로 3.6배 급증했다.AI 열풍의 직접적인 수혜를 입은 반도체와 컴퓨터·주변기기가 수출을 끌어올리면서 지난해 감소했던 미국과 중국 수출도 각각 57%, 76% 증가했다. 석유제품과 철강제품, 무선통신기기, 정밀기기 등도 반등했지만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수출은 관세 장벽과 글로벌 수요 둔화로 각각 4.4%, 7.3% 감소했다. 사실상 반도체가 다른 주력 산업의 부진까지 메우며 한국 수출을 지탱한 셈이다.문제는 반도체 산업으로 돈이 몰리자 국내외에서 대규모 투자와 비용 부담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동시에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정부는 수도권 집중 완화와 지역균형발전을 명분으로 호남권에 대규모 반도체 생산 거점을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맞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400조원씩 모두 800조원 규모를 투자하는 구상이 제시됐다.이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는 두 기업으로서는 전력과 용수, 용지, 인재 확보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하기 전에 또 다른 초대형 투자 계획을 떠안게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반도체 공장 입지는 정치적 요구만으로 결정하기 어렵다. 첨단 공장을 안정적으로 가동하려면 대규모 전력과 공업용수, 넓은 부지뿐 아니라 고급 연구·기술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생산라인 한 곳을 건설하는 데 수십조원이 투입되고 착공에서 가동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만큼 시장 수요와 고객사 접근성, 공급망, 투자 회수 가능성까지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재계에서는 호남 투자의 최대 난제로 인재 확보를 꼽고 있다. 전력과 용수, 용지는 정부가 재정을 투입하고 규제를 완화하면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지만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연구·기술 인력을 호남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생산시설을 건설하더라도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공장 가동과 기술 경쟁력 유지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
- ▲ 경기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모습. ⓒ뉴시스
전력망 구축 비용도 새로운 부담으로 떠올랐다. 한전은 최근 호남권 반도체 산업단지에 공급할 전력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삼성전자에 20조원, SK하이닉스에 5조원 등 총 25조원 규모의 전기요금을 미리 납부하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전력 사용자가 향후 납부할 요금을 대규모로 선납해 송전망 건설 비용에 충당하는 이례적인 방식이다. 막대한 누적 적자로 재무 여력이 악화한 한전이 신규 전력망 투자비를 기업에 먼저 부담시키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이에 대해 한전 고위 관계자는 "기업과 한전이 서로 윈윈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업 입장에서는 공장 건설과 생산설비 투자에 더해 국가 기반시설인 전력망 구축 비용까지 사실상 떠안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해외에서는 미국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미국 정부는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 강화를 명분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현지 생산시설 투자를 지속해서 요구하고 있다.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최근 "미국에서 생산하지 않으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라"며 미국 내 생산 여부와 연계한 반도체 관세 부과 방침을 공개적으로 밝혔다.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생산한 반도체뿐 아니라 이들 제품이 들어간 AI 서버와 노트북 등 완제품에까지 고율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경고다. 이는 사실상 미국 시장에서 사업을 계속하려면 현지에 추가 공장을 지으라는 압박으로 해석된다.특히 미국의 요구는 한국 정부가 지난해 관세 인하 조건으로 합의한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 패키지와 별개로 진행되고 있다. 기존 투자 약속을 이행하는 동시에 개별 기업이 미국 내 반도체 생산능력까지 추가로 확대해야 할 수 있어 부담이 가중되는 구조다.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미국 내 생산 및 연구·개발 시설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 국내 용인 클러스터와 호남권 신규 거점, 일본 등 해외 생산 후보지까지 동시에 검토하면서 투자 재원을 어떻게 배분할지를 놓고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노조와 주주들의 이익 배분 요구도 거세지고 있다. 반도체 호황으로 이익이 급증하자 노동계에서는 영업이익에 연동한 성과급 확대를 요구하고 있고, 행동주의 펀드와 투자자들은 잉여현금흐름을 근거로 배당과 자사주 매입 등 주주환원 강화를 압박하고 있다.반도체 산업은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데다 기술 세대가 바뀔 때마다 천문학적인 선행 투자가 필요하다. 현재의 이익을 각종 비용과 성과 배분에 과도하게 사용하면 다음 불황에 대비하거나 AI 반도체 패권 경쟁에 대응할 재원을 확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기업의 이익은 단순한 여유 자금이 아니라 차세대 공정과 연구·개발, 생산설비에 다시 투입해야 할 생존 자금"이라며 "각국 정부와 이해관계자들이 호황기 이익만 보고 동시에 청구서를 내밀면 정작 기업은 미래 경쟁력을 위한 투자 여력을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