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부품 원가 65% 유럽 등 조달’ 조건美·獨, 방산업체 협력 확대… ATACMS는 독일 생산 추진한화·현대로템·LIG D&A도 현지 공장·합작사로 대응
  • ▲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K9 자주포. ⓒ한화에어로스페이스
    ▲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K9 자주포.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앞으로 K2 전차와 K9 자주포를 한국에서 만들어 빨리 보내는 것만으로는 유럽 수주를 장담하기 어려워졌다. 유럽연합(EU)은 1500억유로 규모 방산 대출에 부품 원가의 65% 이상을 유럽 등에서 조달하도록 했다. 최근 미국과 독일은 양국 방산업체의 협력을 확대하는 의향서에 서명했다. 미국 업체까지 독일 생산기지를 앞세워 유럽 시장에 들어오면서 유럽 방산 시장 경쟁은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15일 로이터에 따르면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장관과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은 미국 워싱턴에서 양국 방산업체 간 협력을 확대하기 위한 의향서(LOI)에 서명했다. 우크라이나·중동 전쟁으로 줄어든 무기 재고를 채우기 위해 양국 방위산업의 생산능력과 공급망을 함께 키우겠다는 취지다. 다만 구체적인 협력 사업과 방식은 추가로 협의하기로 했다.

    이날 회담에서는 독일의 미국산 토마호크 미사일 구매 문제도 논의됐다. 피스토리우스 장관은 미국 무기 구매가 독일의 대미 의존을 심화하기보다 양국 방산업체가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서로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과 독일의 방산 협력은 이미 기업 단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미국 록히드마틴과 독일 라인메탈은 지난 7월 장거리 지대지미사일 에이태큼스(ATACMS)를 유럽에서 공동 생산하기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양사는 합작법인을 세워 독일 운터뤼스에 미국 밖 최초의 ATACMS 생산시설을 구축할 계획이다. 미국과 독일 정부도 이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미국 방산 스타트업 코버넌트도 내년부터 독일 작센주에서 저가형 순항미사일 ‘앤섬’을 생산할 예정이다. 2028년까지 독일 공장의 연간 생산능력을 5000발로 높이는 것이 목표다. 코버넌트는 유럽에서 생산할 미사일 부품의 95% 이상을 현지에서 조달하고, 장기적으로 비유럽산 부품을 모두 없애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미국 방산업체가 유럽 기업과 손잡고 현지 생산에 나서는 것은 유럽 무기 조달시장의 진입 조건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EU는 공동 무기 구매를 지원하는 ‘유럽안보행동계획(SAFE)’을 통해 회원국에 총 1500억유로의 장기 대출을 제공한다. SAFE 자금을 지원받는 무기체계는 부품 원가의 최소 65%를 EU 회원국과 우크라이나, 일정 요건을 갖춘 유럽경제지역(EEA)·유럽자유무역연합(EFTA) 국가에서 조달해야 한다. 한국을 비롯한 제3국산 부품 비중은 원칙적으로 35%를 넘을 수 없다. 

    이 규정이 유럽에서 구매하는 모든 무기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SAFE 자금을 사용하는 조달 사업에 한정된다. 하지만 이미 19개 EU 회원국이 방산 투자계획을 제출했다. 앞으로 유럽의 대형 공동 조달 사업에서는 무기 성능과 가격뿐 아니라 유럽산 부품과 현지 생산 비중이 수주를 가르는 핵심 조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K방산은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빠른 납기를 앞세워 유럽 시장을 뚫었다. 한국에서 생산한 K9 자주포와 K2 전차, 천무 다연장로켓을 곧바로 선적해 유럽의 급한 수요를 채웠다. 그러나 유럽이 방산 투자를 자국의 생산시설과 일자리 확대로 연결하기 시작하면서 완제품을 한국에서 만들어 수출하는 방식만으로는 후속 사업을 따내기 어려워졌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폴란드와 루마니아를 유럽 생산 거점으로 키우고 있는 점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해 9월 폴란드 방산업체 WB그룹과 합작법인 ‘한화 WB 어드밴스드 시스템’을 출범시켰다. 이어 같은 해 12월 폴란드가 도입한 천무의 CGR-080 유도탄을 현지에서 생산하는 40억달러 규모 계약을 체결했다. 발사대와 유도탄을 한국에서 공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폴란드에 천무 탄약 생산체계를 이식하는 사업이다.

    지난 2월에는 루마니아에서 K9 자주포와 K10 탄약운반차를 생산할 유럽 첫 현지 공장을 착공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2024년 루마니아와 K9 54문, K10 36대 등을 공급하는 1조3000억원대 계약을 체결했다. 루마니아 공장은 현지 납품 물량을 생산하는 동시에 향후 유럽 추가 수주를 뒷받침하는 생산·정비 거점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현대로템도 폴란드형 K2 전차인 K2PL의 현지 생산을 준비하고 있다. 현대로템이 지난해 폴란드와 맺은 K2 전차 2차 계약은 65억달러, 총 180대 규모다. 이 가운데 K2PL 61대는 2028년부터 2030년까지 폴란드 남부 글리비체의 부마르와벤디 공장에서 생산된다. 1차 계약이 한국에서 생산한 전차를 빠르게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2차 계약부터는 기술 이전과 현지 생산이 핵심 조건으로 들어갔다. 

    LIG디펜스앤에어로스페이스(LIG D&A)는 독일 최대 방산기업 라인메탈을 통해 유럽 방공시장 진입을 추진한다. 양사는 지난 6월 전략적 제휴를 맺고 LIG D&A의 중·장거리 지대공유도무기와 라인메탈의 초단거리 방공체계를 결합하기로 했다. 유럽 현지에서 LIG D&A의 유도무기를 생산·개량하고, 단거리 방공용 미사일도 공동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양사는 라인메탈이 과반 지분을 가진 유럽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한국산 유도무기를 그대로 수출하는 대신 독일 기업의 영업망과 현지 생산 기반을 활용해 유럽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조달시장에 들어가겠다는 전략이다. 

    한 방산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K방산은 가격이 비싼 유럽산과 납기가 긴 미국산 사이에서 가격과 납기 경쟁력을 앞세웠으나 미국까지 가세하면서 K방산의 틈새가 좁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앞으로 유럽 수주전의 승패는 유럽에서 누구와,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에 달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