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올해 설비투자(CAPEX·카펙스) 비용을 전년 대비 60% 이상 늘리기로 했다. 미국 마이크론 등 후발주자들이 엔비디아의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망에 속속 진입하는 가운데 압도적 물량을 통해 1위 점유율을 수성하기
15일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올해 설비투자 비용으로 29조원을 집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SK하이닉스가 사업보고서를 통해 공시한 지난해 시설투자 비용 17조9560억원 대비 61.5% 증가한 수준이다.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가 올해 설비투자 비용을 늘릴 것이라는데 이견이 없는 분위기였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설 붐에 따라 쏟아지는 빅테크들의 주문 물량을 소화하려면 생산시설이 더 필요한 상황이어서다. SK하이닉스의 카펙스는 반도체 업황 싸이클에 따라 2022년 19조6500억원에서 2023년 6조5910억원으로 크게 줄어들었지만 지난해 다시 기존 수준을 회복한 상태다.
다만 당초 예상된 설비투자 비용보다 그 규모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시장조사업체인 테크인사이츠와 삼성증권 등은 앞서 올해 SK하이닉스의 올해 설비투자비용을 150억 달러, 한화 약 21조원이라 전망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하나증권은 보고서를 통해 연간 설비투자 규모를 기존 27조원으로 상향했고, 시장에서는 여기에서 또 한 차례 비용을 늘려 29조원까지 확대될 것이라 본 것이다.
SK하이닉스의 올해 카펙스 집행 비용의 증가는 미국 마이크론 등 후발주자들이 공격적으로 설비투자 비용을 늘리고 있는 영향으로 풀이된다.
마이크론은 최근 SK하이닉스가 독점해온 5세대 HBM3E 12단 공급망에 진입하는 등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미 퀄(품질) 테스트를 통과하고 AI 가속기 블랙웰 울트라(GB300)에 탑재할 제품 양산에 돌입한 상태로 알려진다.
이를 통해 지난해 5.1%에 불과했던 HBM 시장 점유율을 올해 20%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게 마이크론의 구상이다. 점유율 확보를 위한 생산시설 확대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마이크론은 2025 회계연도(2024년 9월~2025년 8월) 카펙스 전망치로 140억 달러, 한화 20조원을 제시했다. 전년 동기 대비 72.8% 증가한 수준으로, 기존 최대치였던 2022 회계연도 119억8000만 달러를 뛰어넘는 금액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SK하이닉스도 HBM의 안정적인 공급과 시장 점유율 1위 수성을 위해 설비투자 규모를 늘린 것으로 파악된다. 늘어난 설비투자 비용은 하반기 완공을 앞둔 청주 신규팹 M15X의 HBM3E 코어 다이 생산용량 확대에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올해 6세대 HBM인 HBM4 12단 제품 양산도 예상돼 더 많은 생산시설이 필요하다. 지난달 SK하이닉스는 세계 최초로 HBM4 12단 샘플을 고객사에 공급한 상태다. 통상 12단 제품은 8단에 비해 패키징 난이도가 높아 더 많은 생산능력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각에서는 크게 늘어난 SK하이닉스의 설비투자 비용을 두고 우려를 보내는 시각도 있다. 증권가에서는 SK하이닉스의 카펙스가 올해 영업활동현금흐름(OCF) 추정치의 77% 수준으로 보고 있다. 즉, 영업을 통해 벌어들인 돈 1000원 가운데 770원을 설비투자에 사용할 것이란 관측이다. 이 경우 현금 유동성이 둔화할 수 있다.
또한 HBM 수요 증가에 따라 평균판매가격(ASP)이 오를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설비투자를 늘리는 것이 실제 제품 가격 상승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수익성 확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과도한 설비투자 증액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마이크론이 생산능력을 빠르게 확대해 공급량을 늘리려고 하면서 SK하이닉스는 이보다 더욱 빠른 생산능력 확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