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링룸 현황판에 원·달러 환율이 1546.50원을 나타내고 있다 ⓒ연합뉴스
코스피가 AI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원화 가치는 금융위기 수준까지 추락하고 있다. 주가 상승이 원화 강세로 이어졌던 과거 공식이 깨지면서 외국인 차익실현과 환헤지가 환율 상승을 부추기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7일 금융권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지난 5일 주간거래에서 장중 1549.1원까지 치솟으며 2009년 3월 이후 처음으로 1540원대를 돌파했다. 이어 서울 외환시장 야간거래에서는 미국 고용지표 발표 이후 상승폭을 키우며 심리적 저항선인 1550원과 1560원을 연이어 넘어섰고, 6일 오전 2시 1559.0원에 거래를 마쳤다. 장중 고가는 1561.5원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3월 6일 장중 1597.0원 이후 약 17년 3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에 따른 국제유가 상승과 미국 고용지표 호조가 맞물리며 달러 강세 압력이 한층 확대된 영향으로 풀이된다.
◆ 차익실현·환 헤지 거래 … 코스피·원화 ‘탈동조화’
다만 AI 반도체가 코스피 상승세를 견인하는 시점에 원화 약세는 이례적으로 평가된다. 통상 국내 주식 시장이 급등하면 외환시장에 외국인 자금이 유입되면서 달러 공급이 늘고 원화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수출과 무역 흑자 규모가 급증하고, 주식 시장이 활황에 원화 수요가 늘어나는 것이 정상적이다.
코스피와 원화의 동조화가 깨진 것은 외국인이 반대로 움직인 영향이 크다. 외국인은 증시 급등에 포트폴리오 리밸런싱과 차익실현을 위한 매도로 돌아선 모습이다. 지난 5일 오전 유가증권시장에서 1조4000억원 넘게 순매도하며 20거래일 연속 매도 우위를 이어갔다.
연일 주식을 순매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비중은 2004년 이후 20여년 만에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4일 기준 외국인이 보유한 국내 주식 시가총액은 2926조원으로 보유 비중은 38.2%에 달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보유 주식 평가액이 늘면서 20거래일 연속 순매도가 시작되기 직전인 5월 6일(36.1%) 대비 비율은 오히려 높아졌다.
외국인 매도세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주식을 새로 사는 외국인들도 원화 강세에 베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외국인들은 한국 주식을 매수하면서도 환율 변동 위험을 피하기 위한 ‘환 헤지’ 거래를 대거 늘렸기 때문이다.
환 헤지는 외국인이 원화 자산을 살 때 나중에 원화를 달러로 바꾸는 시점에 적용하는 환율을 미리 정해두는 계약이다. 이런 방식은 미국 기준금리가 한국보다 높아진 2022년을 기점으로 더 활발해졌다. 게다가 신규 투자자금에만 환 헤지를 하던 외국인 투자자들은 보유한 잔고까지 헤지를 늘리고 있는 양상이다.
◆ 자금 유입에도 환율 하락 … 달러 해외 재유출
주식 시장에 자금은 들어오지만, 원화 강세 기대가 사라지면서 외국인 자금 유입이 환율 하락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D램 달러’ 현상도 구조적 문제로 거론된다. 반도체 수출 호조로 국내 기업들이 벌어들인 경상수지 흑자가 해외 생산과 운영, 글로벌 투자에 쓰이면서 원화로 환전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수출 호재가 국내에서 원화 수요를 만들지 못하는 고질적인 ‘돈맥경화’가 고환율을 고착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외국인의 누적된 주식 비중이 여전히 높은 만큼 당분간 차익실현과 환 헤지에 따른 환율 상승 압력이 지속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AI 반도체 호황에 따른 증시 호황이 과거처럼 원화 강세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주가와 환율의 탈동조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며 “증시 체력과 별개로 금융당국의 외환시장 리스크 관리가 시급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