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 건설공사 현장. ⓒ뉴데일리DB
노동조합의 잇단 파업으로 건설업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콘크리트 타설 등 핵심 공정 지연으로 건설사들이 막대한 지체상금(지연배상금)을 토해낼 위기에 놓인 것이다. 반면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선진국은 노조 파업을 자연재해와 같은 불가항력적 사유로 보고 공기 연장과 함께 지체상금을 면제해주고 있다. 시공사가 책임을 오롯이 떠안는 현 구조에서는 주택 공급 지연과 건설경기 위축 악순환이 불가피하다는 게 업계 지적이다.
15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전국레미콘운송노조는 레미콘 제조사와 레미콘 운송단가를 5.5%(4200원) 인상하는 방안에 잠정 합의하고 내부 투표 절차에 들어갔다. 다만 앞서 다수 조합원 반발로 1차 합의안이 부결된 바 있어 실제 파업 종료로 이이질 지는 미지수다.
파업이 종료되더라도 건설사들의 지체상금 부담은 지속될 전망이다. 이미 포스코이앤씨를 시작으로 삼성물산과 현대건설, GS건설, 롯데건설 등 상위 10대 건설사 가운데 9곳의 사용자성이 인정되면서 후속 연쇄 파업 가능성이 열려 있는 까닭이다.
건설업계는 파업에 따른 공기 지연을 불가항력 사유로 인정해 지체상금을 완화 및 면제해줄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현행법상 공기 연장이 가능한 사유는 △천재지변 △내란 △전쟁 △원자재 수급 불균형 △전염병 △근로시간 단축 외 기상청 확인이 가능한 태풍·홍수·폭염·한파 △특별재난지역이 발령된 지진 △문화재·오염토 발견 등이며 파업은 빠져 있다.
반면 주요 선진국들은 노조 등 파업으로 인한 공기 지연을 면책 사유로 명문화하고 있다.
우선 미국은 공공공사와 민간공사 모두 파업 관련 시공사 면책 조항이 규정돼 있다.
공공공사 경우 미국 연방조달규정 52.249-14조에 따라 지체상금 면책 사유 9가지 중 하나로 명시돼 있다. 다만 여기에는 해당 파업이 전체 산업군이나 하도급·운송노조 파업 등 통제 또는 예방이 불가능한 성격이면서 시공사의 노동법 위반 및 고의적 협상 지연 등 과실이 없어야 하는 단서가 붙는다.
민간공사도 미국 건축가협회(AIA)가 발표한 표준 계약 조건인 'AIA A201–2017'에 면책 사유가 명시됐다. 태업이나 노사분쟁 등 노동쟁의로 공기가 지연될 경우 건축가(설계사) 검토 후 공기를 연장할 수 있다. 공공공사와 달리 보다 포괄적인 노동쟁의라는 표현을 써 시공사의 면책 범위를 넓혔다.
공공과 민간공사 모두 파업과 노동쟁의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음을 시공사가 직접 입증해야 하지만, 면책 사유 명문화를 통해 시공사 방어권을 보장했다는 점에서 한국과 차이점을 보인다.
영국도 현장에서 널리 쓰이는 표준계약서(JCT)에서 파업이나 노동자 연대를 지체상금 면책 사유로 인정하고 있다.
운송노조나 시멘트 제조공장, 항만 물류 파업 등으로 공사 지연된 사례까지 시공사 면책 사유로 인정해주는 게 특징이다.
특히 현재 국내 사례처럼 레미콘 등 운송노조 파업으로 자재 수급이 끊여 공사가 밀릴 경우 시공사가 이를 공정표로 증명하면 지체상금을 면제받을 수 있다.
다만 늘어난 공기로 인해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금융비용이나 타워크레인 임대료, 현장 관리비 등은 따로 보전해주지 않는다. 즉 파업 등으로 공사가 지연될 경우 공기 연장을 보장해주되 그에 따른 비용 부담은 시공사 몫으로 돌리는 것이다.
▲ 노조 파업 현장. ⓒ뉴데일리DB
일본도 관할 부처인 국토교통성 공식 지침서에 공급망 지연이나 파업이 자연재해와 같은 불가항력 사유로 규정돼 있다.
즉 파업으로 인해 공기 내 준공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 시공사는 발주처에 공기 연장을 청구할 수 있다.
건설업계에서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시행으로 연쇄 파업 가능성이 높아진 만큼 지체상금 면책 사유에 파업을 포함시켜 시공사 방어권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A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레미콘 파업이 철회되더라도 당장 또다른 후속 파업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두세개 노조가 동시다발적으로 교섭 요구와 파업에 돌입할 경우 공기 지연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협회 요구대로 불가항력 사유에 파업을 포함시켜야 한다"면서도 "노조 파업 길을 열어준 정부가 건설업계 요구를 들어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부연했다.
B 중견 건설사 관계자는 "전쟁으로 인한 원자재 수급 불안이 불가항력 사유로 인정되는 데 꼬박 3년 걸렸다"며 "공사비에 지체상금 부담까지 더해지면 건설사 입장에서는 주택 공급 등 신규 사업에 뛰어들 여력이 없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다른 건설업계 관계자는 "법원 판례도 대체적으로 파업을 불가항력 사유로 보고 있지 않다"며 "다만 화물연대 파업 등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공기 연장 사유로 보는 등 법원 판결도 엇갈리고 있어 당분간 현장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향후 노란봉투법 관련 사례와 판례가 누적돼야만 개별 사안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며 "노조의 교섭단위 분리신청이 다수 받아들여지면 공사비 상승과 공기 지연, 복수노조로 인한 협상 불확실성 증가 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