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 유성구 소재 리가켐바이오 본사. ⓒ리가켐바이오
[편집자주] 국내 바이오산업은 오랫동안 기술개발과 기술수출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하지만 최근 시장은 기술수출 자체보다 이후 실제 가치실현으로 이어지는지에 더 주목하고 있다. 뉴데일리는 [K-바이오, 가치실현의 시간] 시리즈를 통해 국내 주요 바이오텍들이 기술을 기업가치와 현금흐름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기술수출과 마일스톤, 상업화와 로열티 등 K-바이오의 새로운 승부처를 짚어본다.
리가켐바이오의 누적 기술수출 계약 규모는 약 9조4000억원으로 국내 바이오텍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다. 그러나 시장은 더 이상 숫자에만 환호하지 않는다. 계약서에 적힌 금액 대부분이 임상과 허가, 상업화 성공을 전제로 한 조건부 금액이기 때문이다.
올해 1분기 처음으로 의미 있는 마일스톤 수익이 실적에 반영되면서 시장 관심도 계약 규모에서 실제 현금 유입으로 이동하고 있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리가켐바이오는 △오노약품공업(일본) △얀센(미국) △포순파마(중국) △시스톤(중국) △익수다(영국) △소티오(체코) 등 글로벌 제약사와 ADC(항체약물접합체) 개발 협력을 진행 중이다. 회사는 수년간 다수의 ADC 후보물질과 플랫폼 기술을 이전하며 국내 대표 ADC 기술수출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바이오업계에서 기술수출 계약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술수출은 그 자체로 기업가치를 평가받는 기준이었다. 계약 규모가 수조원에 달하면 성공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최근 시장 분위기는 달라졌다. 계약서에 적힌 금액 전부를 수령하는 경우는 드물다. 임상 실패나 개발 중단이 발생하면 상당 부분이 실현되지 못한다. 결국 기술수출 이후 임상 진전과 마일스톤, 상업화 성과가 실제 기업가치를 결정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계약보다 후속 성과가 더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리가켐바이오 역시 같은 시험대에 올랐다. 회사는 1분기 기술이전 매출 328억원을 기록했다. 이 가운데 계약금은 133억원, 마일스톤 및 기타 수익은 195억원이다. 신규 대형 기술수출 없이도 기존 프로젝트 개발 진전에 따라 수익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는 리가켐바이오가 강조해 온 '기술수출 이후'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계약 체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임상 개발과 허가, 상업화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마일스톤을 통해 플랫폼 가치를 증명하겠다는 구상이다.
무엇보다 마일스톤 수익은 기술수출 계약이 실제 현금흐름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평가된다. 시장에서는 리가켐바이오가 기술수출 기업에서 가치실현 기업으로 이동하는 초기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향후 기업가치를 결정할 변수 역시 신규 계약이 아니다. 시장 관심은 이미 체결한 계약에서 얼마나 많은 마일스톤이 발생하고, 상업화 단계까지 진입할 수 있는지에 쏠리고 있다.
리가켐바이오가 최근 기업설명회(IR)에서 신규 기술수출보다 파트너사의 임상 진행 상황과 플랫폼 경쟁력 검증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계약 건수를 늘리는 것보다 기존 계약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기업가치에 더 중요해진 시점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현재 가장 중요한 변수는 파트너사 임상 성과다.
시스톤이 개발 중인 ROR1 ADC 'CS5001'은 혈액암 적응증에서 경쟁 약물 대비 우수한 효능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시장 기대를 받고 있다. 포순파마의 HER2 ADC는 임상 3상 단계에 진입한 리가켐바이오의 가장 앞선 파이프라인 가운데 하나다. 얀센이 개발 중인 TROP2 ADC 역시 글로벌 고형암 시장을 겨냥한 핵심 프로젝트로 꼽힌다.
하반기에는 이들 프로젝트의 임상 데이터 발표가 예정돼 있다. 개발 단계가 진전될수록 추가 마일스톤 발생 가능성도 커진다.
자체 파이프라인도 가치실현의 또 다른 축이다. 리가켐바이오는 지난달 CLDN18.2 ADC 후보물질 'LCB02A'의 글로벌 임상 1·2상 시험계획승인(IND)을 획득했다. CLDN18.2는 위암과 췌장암 분야에서 주목받는 표적으로, 회사는 미국과 캐나다, 한국에서 임상을 진행할 예정이며 올해 3분기 첫 환자 투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최근 미국암연구학회(AACR)에서 전임상 데이터를 공개한 BCMA ADC 프로젝트는 기존 다발성골수종 치료제의 한계로 꼽히는 안구 독성 개선에 초점을 맞춘 후보물질이다. 향후 임상 진입에 성공할 경우 차세대 기술수출 자산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연구개발 투자도 확대되고 있다. 1분기 연구개발비는 673억원으로 전년 동기 322억원 대비 109% 증가했다. 공동개발 프로젝트 확대와 신규 임상 진입 준비 영향이다.
비용 증가에 따라 영업이익(-374억원)과 순이익(-333억원)이 적자 전환했지만, 1분기 말 기준 유동자산은 4799억원 규모로 당분간 추가 자금 조달 없이도 임상 확대와 연구개발 투자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리가켐바이오의 다음 과제는 이미 체결한 9조4000억원 규모 계약이 실제 마일스톤과 상업화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입증하는 일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기술수출 능력은 이미 증명했지만 9조4000억원은 아직 실적이 아니다"라며 "이제 시장이 확인하려는 것은 계약 규모가 아니라 실제 들어오는 현금 규모"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국내 ADC 업계에서 기술수출 능력을 증명한 기업은 적지 않다. 하지만 기술수출을 반복적인 현금흐름으로 연결한 기업은 아직 많지 않다"며 "리가켐바이오가 진정한 가치실현 단계에 진입했는지는 향후 마일스톤과 상업화 성과가 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