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경하 제43대 대한병원협회 회장 취임 기자회견 현장. ⓒ박근빈 기자
"필수의료를 담당하는 병원들이 사명감만으로 버틸 수는 없다. 의료는 국방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전략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기반시설이다."  
의정 갈등 이후 대한민국 의료체계가 위기에 몰린 가운데 대한병원협회(병협)의 지휘봉을 잡은 제43대 유경하 회장 집행부는 상생과 혁신, 국가책임형 의료를 핵심 카드로 꺼내 들었다. 
병협은 23일 오후 2시 병협 대회의실에서 취임 기자회견을 열고 병협을 이끌어갈 정책 추진 방향과 조직 개편안을 발표했다. 
유경하 회장은 현재의 의료 환경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규정하며 더 이상 병원계의 희생과 사명감에만 의존하는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단언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화두는 단연 '전공의 수련 체계'와 '필수의료 지원'의 재원 마련 방안이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출신인 유경하 회장은 본인이 현장에서 겪은 저출산 커브와 코로나19 시기의 소아과 붕괴, 전공의 지원율 급락 과정을 생생하게 짚어내며 미충족 필수의료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유 회장은 "지난 의정 사태의 키는 전공의였다"고 평가하며 "전공의는 우리 의료의 미래이지만, 그동안 수련병원에만 그 짐을 다 지워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제는 국가 주도의 수련 체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며 국가가 전공의를 직접 선발하고 수련 교육비를 전액 책임지는 '국가 책임형 수련체계' 도입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에 발맞춰 보험국 측 역시 환산지수나 건보 밴드 규모만 줄이려는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필수의료 인프라 유지는 건보 재정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기를 지났으며 기획재정부 등 범부처가 협력하는 별도의 국고 지원과 지자체의 적극적인 투입이 절실하다는 입장이다.  
◆ 건보 재정 쥐어짜기 식 '보상 돌려막기'… 현장 안팎 뜨거운 감자
정부가 필수의료 강화를 위해 재정을 투입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의료계 안팎에서는 실질적인 보상 방안을 두고 날 선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정부는 대형병원의 중증 중심 구조 전환을 추진하는 한편, 과보상 논란이 일었던 검체검사나 특수영상(CT·MRI) 수가를 조정해 필수의료 영역으로 재원을 돌리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는 한정된 건보 재정 파이 안에서 '아랫돌 빼서 윗돌 고이기' 식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매섭다. 단순 행위별 수가 인상만으로는 병원의 고질적인 필수의료 적자 구조와 24시간 대기 인력 유지 비용을 보전하기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통과된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에도 불구하고 '12대 중대과실'에 대한 사법 리스크 면책 범위가 여전히 모호해, 확실한 법적 안착과 실질적인 보상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대책에 그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지 오래다.  
◆ 대학병원과 중소병원의 이권 갈등…"우리는 달리기가 아닌 축구 하는 것"
정부가 추진 중인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사업 속에서 중소병원들이 '단순 환자 전달 통로'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도 명확한 전술을 제시했다. 회장 직속 특별위원회인 '상생협력위원회'를 출범한 것이다. 
박종호 부산시병원회장이 키를 잡은 이 위원회는 향후 서울 중심의 회의 체계를 탈피해 직접 지역 의료 현장으로 이동해 정부 관계자들과 머리를 맞댈 예정이다.  
유 회장은 "우리는 달리기를 하며 경쟁하는 게 아니라 함께 협조해서 골을 넣어야 하는 축구 경기를 하는 것"이라는 비유를 들었다. 
상급종합병원만 살 수 있는 구조는 절대 안 되며, 각 종별 기능에 적합한 지표를 병협이 선제적으로 만들어 국회와 정부에 법안을 제안하겠다는 구상이다.  
◆ 디지털 격차 해소할 AI 조직 신설과 병원계 맞춤형 공제조합 추진
미래 의료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조직 체질 개선안도 공개됐다. 병협은 기존 미래헬스케어위원회와 정보화추진위원회를 통합해 '디지털정보혁신위원회'로 개편하고, 실무를 지원할 'AI전략사업국'을 신설했다. 
이를 통해 급변하는 기술 트렌드에 대응하는 것은 물론, 대형병원과 중소병원 간의 디지털 격차와 EMR 통합 문제 등을 병협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조율하고 의사 수 추계 데이터 분석에도 AI를 적극 활용할 방침이다.  
아울러 책임보험 가입 의무화 법안에 대응하기 위한 '의료사고배상공제조합' 설립 계획도 구체화했다. 
유 회장은 "현재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는 회원 병원들에게 추가적인 재정 부담을 지우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며 "향후 1년간 연구용역 과제를 통해 타당성과 재무적 안정성을 면밀히 검토한 후 병원계 맞춤형 공제 체계를 안착시키겠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