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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는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한국 경제의 체력은 오히려 갈라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성장의 대부분을 견인하는 사이 건설·석유화학 업종의 버티는 힘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반도체가 가린 균열이 금융권의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24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6년 상반기 금융안정보고서'는 한국 경제의 회복을 떠받치는 축과 그 뒤편의 취약 고리를 동시에 보여준다. 반도체와 조선은 수출과 실적을 끌어올렸지만 건설·석유화학·금속제품·도소매·부동산 업종은 수익성과 재무건전성이 빠르게 나빠졌다. 성장률 숫자만으로는 잡히지 않는 산업 간 온도차가 금융안정 리스크로 번지는 구조다.
◆ 삼성·SK가 끌어올린 성장률 … 취약업종은 이자도 못 갚는다
반도체 호황은 이미 거시 지표를 바꿔놓고 있다. 재정경제부의 6월 최근경제동향에 따르면 5월 수출은 반도체·컴퓨터·선박 수출 확대에 힘입어 전년 동월 대비 53.2% 증가했다. 일평균 수출액도 42억 8000만달러로 60.7% 늘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5월 수출입 동향에서도 전체 수출은 877억 5000만달러로 월간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고, 반도체 수출은 371억 6000만달러로 169.4% 급증했다.
한은 보고서에서도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반도체가 포함된 전기전자 업종의 매출액영업이익률은 2024년 8.8%에서 지난해 15.0%로 뛰었다. 조선·기타운수 업종도 같은 기간 7.2%에서 11.7%로 올라섰다. AI 서버 투자 확대와 메모리 가격 상승, 조선 수주 호황이 기업 실적을 끌어올렸다.
문제는 반도체가 만든 숫자 뒤에서 취약업종의 체력이 빠르게 꺼지고 있다는 점이다. 건설업 이자보상배율은 2021년 8.1배에서 지난해 1.0배로 급락했다. 석유화학은 14.1배에서 1.3배, 금속제품은 15.7배에서 3.2배로 낮아졌다. 도소매업도 3.5배에서 1.9배로 떨어졌고 부동산업은 1.5배 수준에 머물렀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과거보다 크게 약해진 셈이다.
산업 현장의 체감경기도 엇갈린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7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 전망치는 98.0으로 4개월 연속 기준선 100을 밑돌았다. 제조업 전망치는 95.6으로 한 달 만에 다시 부정 전환했다. 전자·통신장비는 112.5, 의약품은 125.0으로 호조였지만 금속·금속가공은 88.5, 일반·정밀기계는 94.7, 자동차·기타운송장비는 96.8, 석유정제·화학은 96.7에 그쳤다. 수출은 살아나도 내수와 투자, 자금사정의 회복감은 확산되지 못하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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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약업종 대출 48.1% … 금융권으로 번지는 부실 그림자
산업 부진이 위험한 이유는 금융권 익스포저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한은은 건설·석유화학·금속제품을 '취약업종', 도소매와 부동산을 '주의업종'으로 분류했다. 올해 1분기 기준 취약업종의 기업대출 비중은 11.6%, 주의업종 비중은 36.5%다. 전체 기업대출의 48.1%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업종에 노출돼 있다는 뜻이다.
연체율은 이미 건설·부동산·도소매에서 먼저 튀고 있다. 건설업 연체율은 5.48%로 높았고 부동산업은 3.01%, 도소매업은 2.52%를 기록했다. 금속제품 0.80%, 석유화학 0.65%와 비교하면 금융권 부담은 건설·부동산·도소매 쪽에서 더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비은행권 의존도도 위험을 키우는 요인이다. 건설업의 비은행 대출 비중은 47.3%에 달했다. 부동산업은 30.9%, 도소매업은 20.0%였다. 전기전자 2.8%, 자동차 1.8%와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취약업종 부실이 커질 경우 은행보다 저축은행·상호금융·캐피털 등 비은행권으로 충격이 먼저 번질 수 있는 구조다.
부실의 중심도 바뀌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국내은행 고정이하여신은 2022년 9월 말 9조 7000억원에서 올해 3월 말 17조 7000억원으로 늘었다. 올해 3월 말 부실대출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58.9%로 2016년 3월 말 32.2%보다 크게 높아졌다. 대기업 비중은 같은 기간 60.4%에서 20.5%로 낮아졌다. 1개월 이상 연체한 중소기업 차주 수는 2만 2339곳에서 5만 8372곳으로 약 2.6배 늘었다.
◆ 반도체 착시 뒤 금융안정 리스크 … 구조조정 압력 커진다
한은이 주목한 것은 단순한 업종별 실적 차이가 아니다. 반도체와 조선이 성장률과 수출을 끌어올리는 동안 내수·부동산 관련 업종과 전통 제조업의 부실이 금융권 장부에 누적되는 흐름이다. 반도체 호황이 경기 회복의 대표 지표처럼 보이지만 금융권이 떠안은 대출 구조는 훨씬 넓고 취약하다.
재정경제부도 6월 최근경제동향에서 4월 전산업생산과 설비투자, 소매판매가 감소했고 광공업·서비스업·건설업 생산이 모두 줄었다고 평가했다. 수출은 반도체 중심으로 강하지만 실물 경기 전반은 아직 균일하게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KDI 역시 6월 경제동향에서 수출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높은 증가세를 이어가지만 건설투자는 부진하다고 진단했다.
한은은 취약업종에 대해 산업 체질 개선을 위한 중장기 구조조정을 일관되게 추진하되, 필요시 유동성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금융지원도 병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단순한 만기 연장이나 부실 이연만으로는 구조적 격차를 줄이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황건일 금융통화위원은 "취약부문 부실이 늘고 주택가격 상승과 레버리지 투자가 확대되면서 금융안정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며 "경제 전반의 양극화 심화가 금융안정에 잠재적 위험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