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좌)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연합뉴스, SK
AI(인공지능) 경쟁의 무게중심이 반도체 확보전에서 조직 실행력과 전력 인프라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엔비디아 GPU(그래픽처리장치)와 HBM(고대역폭메모리)를 누가 먼저 확보하느냐가 1차 승부였다면, 이제는 확보한 AI 역량을 실제 업무 생산성과 신사업으로 얼마나 빠르게 전환하느냐가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AI를 도입하는 기업은 늘었지만 이를 조직 운영체계와 수익모델로 연결하는 기업은 아직 제한적이라는 점에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동시에 ‘AI 전환(AX)’을 전면에 내세운 배경도 여기에 있다. 삼성은 외부 생성형 AI 서비스를 업무 현장에 열고, 고성능컴퓨팅(HPC) 기반 디지털트윈 인프라까지 구축하며 개발 방식 혁신에 속도를 내고 있다. SK는 ‘1인1에이전트’를 앞세워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AI 2차전의 승부처가 반도체를 넘어 조직과 제품 개발, 데이터센터 인프라로 확장되고 있다.
◇AI 경쟁축, ‘확보’에서 ‘활용’으로
15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DX부문 업무에 챗GPT, 제미나이 엔터프라이즈, 클로드 등 외부 생성형 AI 서비스를 공식 도입했다. 자체 생성형 AI ‘가우스’를 중심으로 운영하던 기존 기조에서 벗어나 업무 목적에 따라 외부 AI까지 활용하도록 문을 연 것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DX부문의 비즈니스 경쟁력을 높이고 고객에게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조치다.
특히 DX부문은 디지털트윈 기반 개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서울 마포구 상암 데이터센터에 HPC 서버 517대를 구축하고 최근 내부 개발 인력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새 인프라는 기존 대비 연산 속도를 약 5.8배 높이고 가상 검증량을 약 6배 늘릴 수 있게 됐다.
디지털트윈은 현실 속 제품과 공정을 가상 공간에 구현해 다양한 조건을 시뮬레이션하고 결과를 예측하는 기술이다. 삼성전자는 이를 스마트폰 낙하 시험, TV 낙하·발열 검증, 세탁기 장기 검증, 로봇청소기 충돌 검증 등에 활용할 계획이다. 기존 15일이 걸리던 TV 낙하 검증은 2일로, 세탁기 낙하 검증은 5일로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스마트폰은 기존 물리 시험으로 한계가 있었던 모든 각도의 낙하 검증까지 가능해진다.
이는 AI 활용 경쟁이 실제 제품 개발 현장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개발 단계의 가상 검증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신제품 출시 주기 단축과 품질 신뢰성 제고가 가능해진다. 삼성전자가 지난 3월 2030년까지 국내외 모든 생산 공장을 AI 자율공장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힌 것과 맞물려, 개발부터 제조까지 디지털트윈 기반 AX 체계를 구축하는 흐름으로 볼 수 있다.
SK그룹도 조직 차원의 AX에 속도를 내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 11일부터 13일까지 열린 ‘2026뉴이천포럼’에서 “360도 전방위로, 전속력으로 AX에 돌입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특히 “나의 AI에서 우리의 AI로 진화해야 한다”며 ‘1인1에이전트’ 구상을 제시했다. 개인이 AI를 보조도구로 쓰는 수준을 넘어 조직 전체의 업무 성과로 연결하겠다는 의미다.
주목할 대목은 최 회장이 AX의 본질을 운영개선(O/I·Operation Improvement)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AI 도입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업이 하는 일을 다시 정의하고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과정이 핵심이라는 뜻이다. 결국 총수 주도의 AX는 기술 도입이 아니라 조직 운영체계의 재설계에 가깝다.
◇반도체 다음 전쟁은 실행력과 인프라
AI 경쟁의 또 다른 축은 인프라다. AI 서버와 데이터센터가 늘어날수록 기업들은 반도체뿐 아니라 이를 안정적으로 구동할 전력과 냉각, 고성능 연산 환경까지 확보해야 한다. AI 데이터센터는 서버 전력은 물론 냉각 설비, 전력 변환 장치, 네트워크 장비까지 대규모 투자를 요구한다.
삼성전자가 이번 HPC 인프라를 외부 클라우드가 아니라 자체 시스템으로 구축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제품 설계 도면과 검증 데이터 등 핵심 기술 자산을 내부에서 처리해 보안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대규모 해석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과 SK의 전략은 결이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SK는 AI를 조직 내부에 심는 AX에 집중하고, 삼성은 외부 AI 개방과 디지털트윈 기반 개발 혁신을 통해 업무 생산성과 제조 경쟁력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AI 산업이 반도체 확보 경쟁에서 조직 운영, 제품 개발, 데이터센터 인프라 경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두 그룹의 움직임은 같은 변곡점을 가리킨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금 전속력으로 전방위적인 AX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맞이한 절호의 기회는 다시 쉽게 오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