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투자 발표 후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삼성전자와 SK그룹이 4700조원대 투자 구상을 내놨지만 핵심 실행 주체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공시는 정부 발표보다 훨씬 신중했다. 정부는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를 2030년까지 밀어붙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지만 기업들은 투자 규모와 일정이 시장 상황과 경영환경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명시했다. 발표장에서는 메가프로젝트였지만 공시상으로는 확정된 착공표가 아니라 조건부 청사진에 가까웠다.
삼성전자는 지난 29일 장래사업·경영계획 공시에서 2026년부터 2040년까지 약2450조원 규모의 국내 투자 비전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 반도체 투자는 약2100조원이다. 용인 및 기존 반도체 단지 1650조원, 광주 400조원 등이 포함됐다. 공시상 추진 종료일은 2040년 12월 31일이다. 정부가 앞세운 2030년 시간표와 삼성전자의 공시상 투자 종료 시점 사이에는 10년의 간극이 있다.
삼성전자는 정정공시를 통해 투자 계획의 성격도 분명히 했다. 해당 계획은 “현재 시황에 근거한 장래계획”이자 “이해를 돕기 위해 제공하는 가이드라인”이며 향후 시장 상황과 경영환경 변화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가 국가 프로젝트로 부각한 것과 달리 기업은 구속력 있는 집행안이 아니라 장래 투자 방향이라는 점을 못 박은 셈이다.
SK하이닉스도 같은 결을 보였다.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약600조원, 청주 생산기지 약100조원, 서남권 클러스터 약400조원 등 약1100조원 규모의 중장기 투자 전략을 공시했다. 다만 전체 투자 계획의 시작일과 종료일은 특정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일정과 투자 계획은 향후 이사회 승인을 거쳐 확정되는 시점에 추가 공시하겠다는 단서도 달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사회 승인 절차를 거치기 전에 수백조원대 투자계획을 대외적으로 발표한 것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기업 공시상으로는 장래계획이자 가이드라인 성격을 분명히 했지만 정부 행사에서는 사실상 확정 투자처럼 비칠 수 있는 규모와 방향이 먼저 공개됐기 때문이다.
◇총수들도 확정 대신 전제 달아 … 발표와 집행은 다르다
두 총수의 발언에도 신중함이 묻어났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광주를 “후보지로 계획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서남권 투자와 관련해 “제반 요건을 충족하는 곳”이라는 전제를 단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 모두 투자 시점과 착공 일정을 못 박지는 않았다.
이는 서남권 반도체 구상이 아직 최종 실행 단계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반도체 팹은 기업이 돈을 쓰겠다고 선언한다고 곧바로 지을 수 있는 시설이 아니다. 전력, 용수, 부지, 인허가, 협력사 이전, 핵심 인력 정착 조건이 동시에 맞아야 한다.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 겸 부회장이 원스톱 행정, 전력, 용수, 정주여건을 정부에 요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시의 변동 가능성 문구 자체를 투자 철회 신호로 단정할 수는 없다. 장래사업·경영계획 공시에서 시황과 경영환경 변화에 따른 변동 가능성을 고지하는 것은 통상적인 리스크 관리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부가 4700조원대 투자 발표를 정책 성과로 내세운 직후라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기업들이 공시에 남긴 단서는 발표액이 곧 집행액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뉴데일리
◇전력·용수에 팹당 200조원 부담까지 … 산 넘어 산
실현 가능성을 가르는 첫 관문은 인프라다. 서남권 반도체 생산거점에는 전력6.3GW와 용수65만톤/일이 필요하다. 전력6.3GW는 1.4GW급 신규 원전 4~5기 설비용량에 해당한다. 송전망 인허가, 주민 수용성, 용수 배분, 가뭄 대응, 하수 재이용수 활용까지 풀어야 한다.
부지 조성도 만만치 않다. 팹 건설에는 토지 보상, 기반 공사, 도로·전력·용수 연결, 협력사 입주가 동시에 필요하다. 여기에 배후 주거지, 학교, 병원, 교통, 문화시설 등 정주여건이 따라오지 않으면 핵심 인력과 협력사가 지역으로 이동하기 어렵다. 공장만 지방에 세워도 생산 생태계가 따라오지 않으면 반도체 거점은 완성되지 않는다.
자금 부담도 커졌다. 업계에서는 메모리 팹 1기당 건설비가 3년 전 30조~60조원 수준에서 최근 150조원 안팎으로 뛰었고, 호남권·용인 투자가 마무리되는 시점에는 200조원을 넘어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서남권에 총800조원을 투자해 메모리 팹4기를 짓겠다는 구상도 단순 계산하면 팹1기당 약200조원 규모다.
결국 4700조원은 당장 집행되는 확정 예산이 아니다. 전력·용수·부지·인허가·정주여건·업황·수익성을 모두 통과해야 실제 착공과 가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부가 인프라 공급 일정과 재원 조달 방안을 숫자로 내놓지 못하면 투자 발표는 공허한 청사진에 그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공시 문구는 통상적인 장래계획 고지지만, 이번처럼 정부가 대규모 투자 발표를 정책 성과로 내세운 상황에서는 의미가 작지 않다”며 “4700조원 프로젝트는 확정된 착공표가 아니라 정부 인프라와 기업 수익성이 모두 맞아야 움직이는 조건부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