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일 주유소 현장ⓒ김수한기자
"정유사 보면, 걸핏하면 우리가 봉이냐며 억울해하잖아요. 국제 유가 탓이다, 정부 정책 탓이다 하면서요. 그런데 담합했다는 뉴스 보니 결국 진짜 봉은 이유도 모르고 비싼 기름 넣은 소비자 아닙니까?"
7일 주유소 앞, 주유기 옆 미터기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는 시민 표정에는 분노가 서려 있다.
◆"2조 벌 듯"… 수면 위로 드러난 26조 담합 의혹, 소비자들 분노시민과의 대화에서 가장 큰 화두는 전날 검찰에서 발표된 '정유4사 가격 담합 의혹'이었다.
미국과 이란 간 중동 전쟁 발발 직후 국내 주유소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690원대에서 불과 닷새 만에 1800원을 돌파하며 치솟았다. 서민 경제에 드리워진 위기에 3월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아무리 돈이 마귀라고 하지만 너무 심하다"며 강도 높은 조사를 지시했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는 6일 정유 4 사와 임직원들을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은 4개사로 인해 시장 전체 경쟁 제한 효과가 26조 원에 달했다고 밝혔다.
특히 임직원들이 사내 메신저를 통해 "올해 2조 벌 듯", "전쟁으로 먹고사는 회사" 등 조롱 섞인 대화를 나눈 사실이 적발되면서 여론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30대 주부 A 씨는 "몇 년에 한 번씩 기름값 담합 얘기가 나오고 그때마다 반성한다고 하지만 결국 똑같다"며 "밀가루, 설탕에 이어 기름값까지 이러니 버는 사람만 버는 세상이라는 생각에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50대 직장인 B 씨의 말은 유가 담합 사태를 본 소비자의 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살면서 기름값 오르는 거 여러 번 봤고, 그때마다 국제유가 때문, 환율 때문, 전쟁 때문이라는 설명도 수없이 들었죠. 물론 기업도 이윤을 내야 한다는 거 압니다. 정유사에 손해 보며 장사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담담하게 말을 잇던 B 씨는 점차 울분을 토했다. "하지만 시장을 믿어 달라고 하면서 뒤에서는 가격을 맞추고, 소비자가 모르는 방식으로 이익을 키우고 있던 거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죠"라며 "회사원들 월급은 몇만 원 오르기도 힘든데 장바구니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잖아요. 기름값 몇백 원 차이가 매일 차를 몰고 출근하는 사람에게는 한 달 생활비가 걸린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는 이번 담합을 단순한 업계 관행이라는 말로 덮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번 돈들이 결국 누구 주머니에서 나갔는지를 물어야죠. 이런 사태가 날 때마다 이유도 모른 채 비싼 기름을 넣어야 했던 소비자를 봉으로 아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듭니다."
▲ 7일 주유소 현장ⓒ김수한 기자
◆ "애초에 가격 짬짜미 불가"… 정유업계의 억울함정유업계는 검찰의 담합 혐의에 대해 "법정에서 소명하겠다"며 공식적으로는 말을 아끼고 있다.
다만, 담합 조사 초반부터 기업이 폭리를 취했는지 여부를 떠나 애초에 경쟁사끼리 가격을 임의로 맞출 수 있는 시장 환경 자체가 아니라는 항변이 나온다.
국내 주유소 공급가는 국제 시장 기준인 싱가포르 현물 가격(MOPS)에 연동된다. 국제유가 변동이 국내 가격 산정에 즉각 반영되기 때문에 정유 4 사의 가격 등락 추세가 비슷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업계는 "경쟁사 가격 확인은 통상적인 시장 조사"라는 입장이다.
투명하게 노출되는 가격 정보도 담합이 어렵다는 근거로 제시된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 오피넷을 통해 정유사별 주간 공급가가 매주 공개된다. 사마다 원유 도입 시점과 계약 조건, 재고 물량이 달라 억지로 동일한 가격 정책을 따라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2011년 이명박 정부 당시에도 "기름값이 묘하다"며 대대적인 담합 조사가 이뤄져 과징금이 부과된 바 있다. 하지만 정유사들의 불복 소송 끝에 2015년 대법원에서는 "객관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줄줄이 무혐의 확정판결을 내렸다. 당시에도 명확한 가격 담합 증거를 찾지 못해 무리하게 조사를 벌였다는 비판이 있었다.
▲ 7일 주유소 현장ⓒ김수한기자
◆시장 통제의 역설 … "결국 지갑이 비는 건 소비자"업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최고가격제 등 정부의 인위적인 시장 개입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번 조사가 대대적인 '정유사 겁주기'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주유소 인근에서 만난 30대 자영업자 C 씨는 "고유가 때마다 나오는 레퍼토리다. 이제 정부의 정유사 겁주기가 시작된 것 같다"며 "정유사가 겁먹어서 가격을 내리고, 정부의 치적이 되는 건 반복돼 온 패턴"이라며 담합 조사 의도를 의심하기도 했다.
정부가 서민의 짐을 덜고자 한다면 유가 형성 구조를 명확히 인지하고 유류세를 추가로 낮추는 등의 정공법을 택해야 할 시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