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이 5일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삼겹살 음식점 '형님 저요'에서 '삼쏘(삼겹살·소주) 회동’을 갖고 있다.ⓒ서성진 기자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방한 메시지는 김포공항에서 홍대 삼겹살집까지 하나로 이어졌다. 공항에서는 “한국에 많은 사업과 일거리를 가져왔다”고 했고, 저녁 회동에서는 “HBM(고대역폭메모리), HBM, 더 많은 HBM”을 외쳤다. 겉으로는 삼겹살과 소주를 곁들인 친교 자리였지만, 본질은 엔비디아 차세대 AI 공급망에서 한국 기업의 역할이 더 커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황 CEO는 5일 김포공항으로 입국한 직후 기자들과 만나 한국 파트너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AI 구축이 가속화되고 있고 한국 시장도 잘하고 있다”며 “하반기는 상반기보다 더 커지고, 내년에도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방한 목적에 대해서도 “파트너들과 준비가 맞춰져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HBM과 AI 인프라 공급망을 직접 점검하는 성격이 강했다는 의미다.
이날 황 CEO의 동선도 상징적이었다. 첫 일정은 홍대 T1 베이스캠프였다. 그는 e스포츠 구단 T1 소속 ‘페이커’ 이상혁 등 선수단과 만나 “게임은 엔비디아의 기원”이라고 말했다. 엔비디아가 게임용 그래픽처리장치(GPU)에서 출발해 AI 가속기와 데이터센터 시장의 핵심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점을 한국 PC방과 e스포츠 문화 속에서 다시 각인한 것이다.
저녁에는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 인근 고깃집 ‘형님 저요’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과 마주 앉았다. 지난해 치킨집 ‘깐부 회동’이 삼성전자·현대차와의 상징적 만남이었다면, 이번 ‘삼쏘 회동’은 HBM, AI PC, 로보틱스, 소버린 AI로 넓어지는 엔비디아의 한국 협력 지도를 보여준 자리였다.
황 CEO가 회동에서 가장 강하게 반복한 단어는 HBM이었다. 현장에서는 HBM 칩을 형상화한 과자 선물이 오갔고, 황 CEO는 “HBM, HBM, More HBM”이라고 말했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플랫폼이 대량의 고대역폭메모리를 필요로 하는 만큼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한국 메모리 공급망의 중요성을 다시 부각한 발언이다.
황 CEO는 “사업이 호황”이라며 “한국 파트너들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차세대 AI 슈퍼컴퓨터 플랫폼, AI PC 플랫폼 RTX 스파크, 자율주행·로보틱스용 프로세서 등을 거론하며 “한국에 네 가지 새로운 사업을 가져왔다”고 밝혔다. 그는 “올해는 신제품이 하나였지만, 내년에는 네 가지가 될 것”이라며 “한국은 정말 바빠질 것”이라고도 했다.
이는 엔비디아의 한국 협력이 HBM 공급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AI 서버에 필요한 HBM과 D램, AI PC에 들어가는 LPDDR5 메모리, 로보틱스와 자율주행용 프로세서, AI 연구센터 인력까지 한국 기업과 인재가 관여할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황 CEO가 “AI 연구원이나 엔지니어를 안다면 연락하라”고 한 대목도 한국 내 R&D센터 채용이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5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고깃집에서 최태원 SK회장, 구광모 LG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과 삼겹살 회동을 하고 있다.ⓒ서성진 기자
이번 회동에서 가장 선명하게 부각된 축은 SK와 엔비디아의 AI 동맹이다. 최태원 회장과 황 CEO는 최근 7개월 동안 공개적으로 알려진 것만 6차례 만났다. 지난해 10월 경주 APEC을 시작으로 미국, 대만, 한국에서 회동을 이어왔고, 지난 1~2일 대만 GTC 타이베이와 컴퓨텍스에서도 별도 만남을 가진 뒤 곧바로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양사의 협력은 HBM 공급을 넘어 AI 인프라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HBM 핵심 공급사로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SK그룹은 엔비디아 GPU(그래픽처리장치) 기반 제조 AI 클라우드, 디지털 트윈 플랫폼, 6G 핵심 기술인 AI-RAN 등으로 협력 범위를 넓히고 있다.
최 회장은 회동 분위기를 가볍게 전했다. 어떤 대화를 나눴느냐는 질문에 “삼겹살이 맛있다”고 답했고, 젠슨 황에게 쌈 싸 먹는 법을 누가 알려줬느냐는 질문에는 “이해진 의장이 시범을 보였다”고 말했다. 황 CEO의 주량을 묻는 질문에는 “나보다 잘 마신다”고 웃었다. 최 회장이 HBM 칩 모양 선물을 나눠주며 “내가 산타클로스가 된 것 같다”고 말한 장면은 엔비디아가 필요로 하는 HBM과 SK하이닉스의 공급망 위상을 직관적으로 보여줬다.
▲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5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고깃집에서 열린 최태원 SK회장, 구광모 LG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과의 삼겹살 회동에 참석하고 있다.ⓒ서성진 기자
구광모 회장은 이번 자리를 공식 협상보다 친목 성격이 강한 자리로 설명했다. 그는 “오늘은 편안한 자리라 친목을 다졌다”며 “월요일에 따로 미팅이 있다”고 말했다. 피지컬 AI 관련 논의 여부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을 피했지만, LG와 엔비디아가 별도 회동에서 협력 의제를 논의할 가능성을 열어둔 발언이다.
LG의 접점은 전장, 디스플레이, 로봇, 제조 AI에 걸쳐 있다. 엔비디아가 데이터센터를 넘어 자율주행, 로봇, 공장 자동화 등 현실 산업에 적용되는 피지컬 AI를 강조하는 만큼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등 계열사와의 협력 가능성도 거론된다. 네이버 역시 AI 데이터센터와 소버린 AI 영역에서 엔비디아와 접점이 크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젠슨 황 CEO의 방한 일정은 엔비디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 번에 보여준다”며 “황 CEO가 게임업계와 대기업 총수, AI 스타트업, 연구기관을 잇달아 만나는 것은 한국을 단순 판매시장이나 부품 조달처가 아니라 AI 생태계 전반의 핵심 파트너로 보고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
황 CEO와 총수들은 이날 삼겸살과 소주를 마신 후 인근 비비큐(BBQ) 홍대입구점을 찾아 2차로 'K치킨'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