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8일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을 만나 HBM과 파운드리 협력 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삼성전자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방한 일정은 한국 산업계의 AI(인공지능) 재편 구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황 CEO는 이날 SK그룹을 시작으로 LG그룹, 서울대, 현대자동차그룹, 네이버를 잇따라 찾았다. 저녁에는 삼성전자 경영진과도 만나 HBM(고대역폭메모리)과 파운드리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엔비디아가 한국을 단순 반도체 공급기지가 아니라 AI 팩토리, 로봇, 모빌리티, 클라우드까지 아우르는 아시아 AI 인프라 허브로 묶고 있다는 점이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최대 메모리 파트너로 지위를 재확인했고, 삼성전자는 HBM4·HBM4E와 파운드리 협력으로 반격 의지를 드러냈다. LG와 현대차는 피지컬AI와 AI 데이터센터, 자율주행·로봇으로 협력 범위를 넓혔다. 한국 기업들의 경쟁 축이 ‘누가 엔비디아에 메모리를 공급하느냐’에서 ‘누가 엔비디아 AI 생태계에서 더 큰 역할을 맡느냐’로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SK, HBM 넘어 AI 팩토리로 확장
황 CEO의 8일 첫 공개 일정은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이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만난 그는 SK하이닉스를 “앞으로도 엔비디아의 최대 메모리 파트너”라고 평가했다. 최 회장도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가장 큰 메모리 공급업체가 되고, 엔비디아는 SK하이닉스의 가장 큰 고객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슈퍼컴퓨터 베라 루빈, 베라 CPU(중앙처리장치), AI PC 플랫폼 RTX 스파크, 로봇 컴퓨팅 플랫폼 젯슨 토르 등에 들어갈 메모리 기술 협력을 추진한다. 이는 엔비디아 제품 로드맵 단계에서부터 메모리 사양과 성능을 함께 맞추는 공동개발 성격이 강하다.
SK텔레콤도 엔비디아 DSX 플랫폼 기반의 AI 팩토리 구축에 나선다. SK는 2027년 한국에서 GW급 AI 팩토리 가동을 목표로 제시했다. AI 팩토리는 AI 학습과 추론에 특화된 차세대 데이터센터다. SK그룹이 메모리 공급사에 머물지 않고 AI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운영까지 확장하려는 전략이 구체화된 셈이다.
▲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8일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만난 뒤 브리핑하고 있다.ⓒ서성진 기자
◇LG, 피지컬AI와 데이터센터 인프라 전면에
황 CEO는 이어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회동했다. 양측은 로보틱스, AI 데이터센터, 모빌리티를 핵심 협력 분야로 제시했다. 황 CEO는 LG와 “하나의 팀처럼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LG의 강점은 AI 인프라의 후방 생태계다. LG전자는 엔비디아의 아이작, 그루트, 코스모스 플랫폼을 활용해 휴머노이드와 물류 로봇 개발을 강화한다. LG이노텍은 로봇용 센싱 모듈과 광학 부품 개발을 맡고, LG CNS는 산업용 로봇 플랫폼에 엔비디아 로보틱스 기술을 접목한다.
AI 데이터센터 협력도 중요하다. AI 서버가 대형화될수록 전력과 냉각은 핵심 병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LG전자는 냉각수 분배장치, 콜드플레이트, 액침 냉각 등 열관리 솔루션 협력을 추진한다. LG유플러스와 LG CNS는 엔비디아 DSX 기반 AI 팩토리 구축을 검토하고, LG에너지솔루션은 800V 직류 기반 데이터센터 전력 솔루션 협의를 진행 중이다.
▲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8일 서울 여의도 LG 트윈타워에서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만난 뒤 취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연합뉴스
◇현대차·서울대·네이버까지 … AI가 물리 세계로 간다
정오께 황 CEO는 서울대 해동첨단공학관을 찾아 학생들과 만났다. 그는 한국이 전자산업, 제조업, 기계공학, 클라우드, AI 역량을 동시에 가진 드문 나라라고 평가했다. AI 패권 경쟁이 반도체뿐 아니라 인재 확보 경쟁이라는 점에서 서울대 방문은 상징성이 컸다.
오후에는 현대차그룹 양재 사옥을 방문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황 CEO에게 수소전기차 넥쏘, 목적기반차량 PV5, 보스턴다이내믹스의 4족 보행 로봇 스폿, 모빌리티 로봇 플랫폼 모베드 등을 직접 소개했다.
황 CEO는 “AI의 다음 물결은 모빌리티와 피지컬AI”라고 말했다. 피지컬AI는 AI가 자동차, 로봇, 산업 설비 등 실제 물리 세계에서 판단하고 움직이는 기술을 뜻한다. 엔비디아의 AI 컴퓨팅 플랫폼과 현대차의 제조·모빌리티 역량이 결합하면 자율주행, 로봇, 스마트 제조 분야에서 협력이 확대될 수 있다.
네이버 1784 방문도 같은 맥락이다. 네이버는 초거대AI와 클라우드, 로봇 친화형 사옥 운영 경험을 갖고 있다. 엔비디아가 한국에서 구축하려는 협력망이 반도체와 제조를 넘어 소프트웨어, 클라우드, 서비스로 넓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이해진 네이버 의장이 8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네이버 1784 사옥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삼성, HBM4·파운드리로 엔비디아 협력 복원
이날 또 하나의 핵심 장면은 삼성전자와 엔비디아의 회동이었다.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 부회장은 엔비디아 측과 만난 뒤 “오랫동안 같이 협력해 왔는데 오늘이 지금까지 중 가장 좋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고 말했다.
전 부회장은 단기적으로 HBM4와 파운드리 협력 방안을 논의했고, 중장기적으로는 공동개발 방향도 협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HBM3E와 SoC를 충분히 공급해야 하고, 내년부터는 HBM4E와 파운드리 비즈니스 등 협력 부분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파운드리 협력도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전 부회장은 “현재 4나노와 8나노 공정에서 필요한 자율주행 칩과 엔비디아의 액셀러레이터 칩 부분에서 협력하고 있고, 다음 세대 협력도 함께 논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율주행 칩에 대해서는 “현재 공급하고 있는 칩”이라고 했다.
HBM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향 공급에서 앞서 있다는 평가가 강하다. 황 CEO도 이날 SK하이닉스를 최대 메모리 파트너로 공개 언급했다. 이에 대해 전 부회장은 “저희는 저희 일을 열심히 할 것”이라며 “나중에 결과로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
▲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정의선 현대자동차 그룹 회장이 8일 서울 서초구 현대자동차그룹 양재 사옥에서 KIA의 전기차 PV-5에 올라타 포즈를 취하고 있다.ⓒ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