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슨 황 엔비디아 CEOⓒ서성진 기자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방한은 한국 기업에 명확한 메시지를 남겼다. 더 많은 HBM(고대역폭메모리)을 만들고, 더 큰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를 짓고, 더 정교한 로봇과 자율공장을 구현하라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제 엔비디아 GPU(그래픽처리장치)를 구매하거나 메모리를 공급하는 단계를 넘어, AI 팩토리와 피지컬 AI 생태계 안에서 새로운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이번 방한의 파장은 산업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반도체 기업은 차세대 AI 메모리 공동개발자로, 통신·포털 기업은 AI 클라우드 운영자로, 제조기업은 로봇과 디지털 트윈을 구현하는 피지컬 AI 사업자로 이동하고 있다. AI 산업의 병목이 GPU에서 메모리, 전력, 냉각, 네트워크, 데이터센터 운영 역량으로 넓어지면서 한국 기업들이 맡아야 할 일감도 동시에 커지는 구조다.
정부도 전면에 섰다.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난 8일 기자들과 만나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플랫폼인 베라 루빈을 한국에 우선 공급받기로 했고, GPU 공급에도 차질이 없도록 지원받기로 했다"고 밝혔다. 기존에 논의된 GPU 26만장 외 추가 공급 가능성에 대해서는 “정부가 준비해야 할 부분”이라며 기존 계획뿐 아니라 향후 추가 사업에 필요한 물량도 문제없이 공급받는 방향으로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AI 인프라 확보가 기업 개별 전략을 넘어 국가 산업정책의 핵심 변수로 떠오른 셈이다.
◇차세대 AI 메모리·AI 클라우드로 판이 바뀐다
가장 먼저 바뀌는 곳은 반도체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베라 루빈 AI 슈퍼컴퓨터, 베라 CPU(중앙처리장치), RTX 스파크 PC, 젯슨 토르 로보틱 컴퓨팅 플랫폼용 메모리를 공동개발한다. 기존 HBM 공급을 넘어 엔비디아의 차세대 제품 로드맵에 맞춰 메모리 사양과 성능을 함께 설계하는 구조다.
황 CEO는 SK하이닉스의 메모리 생산능력 확대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SK가 제공하는 모든 메모리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취지다. AI 수요가 메모리 공급 속도를 앞지르고 있다는 의미다. 앞으로 반도체 업계의 경쟁은 단순한 공급량 확대가 아니라 고객 인증, 전력 효율, 패키징, 플랫폼 최적화 속도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도 같은 압박을 받는다. 황 CEO는 삼성과 오랫동안 협력해 왔고 혁신적인 새 메모리 기술을 함께 개발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HBM4 이후 경쟁에서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모두 엔비디아 등 핵심 고객의 차세대 로드맵에 얼마나 깊게 들어가느냐가 승부처가 된다. 메모리 기업의 역할은 납품사에서 AI 플랫폼 공동 설계자로 바뀌고 있다.
통신과 포털은 AI 인프라 사업자로 이동한다. SK텔레콤은 엔비디아 DSX 플랫폼 기반 풀스택 AI 클라우드 협력을 추진한다. 칩, 시스템, 소프트웨어, 데이터센터 운영까지 묶는 방식이다. 황 CEO는 SK텔레콤과 최대 5기가와트 규모 AI 공장 구축 가능성을 언급했다.
네이버도 AI 클라우드의 축으로 부상했다. 황 CEO는 네이버와 200메가와트 규모 AI 클라우드를 구축한 뒤 최대 1GW까지 확장하는 방안을 거론했다. 그는 1GW 규모 AI 공장에 600억달러가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이 발언대로라면 AI 팩토리는 단순 데이터센터 증설이 아니라 전력, 냉각, 네트워크, 반도체,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초대형 산업 인프라가 된다.
황 CEO는 향후 5년간 한국에 수천억달러 규모의 수익이 유입될 수 있다고 했다. 
◇피지컬 AI가 제조업 일감을 다시 짠다
젠슨 황이 반복해서 강조한 또 하나의 키워드는 피지컬 AI다. 그는 차세대 AI가 언어와 정보 중심의 AI를 넘어 물리적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로봇공학으로 이동한다고 봤다. 한국이 중공업, 제조업, 전자, 소프트웨어, AI 연구 역량을 동시에 갖춘 드문 국가라고 평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차는 자율주행, 스마트팩토리, 로보틱스 분야에서 엔비디아와 접점을 넓히고 있다. LG는 로봇, 센싱 모듈, 모빌리티, AI 인프라 분야에서 협력 범위를 키운다. 두산은 로보틱스와 발전·전력 인프라에서 기회를 찾고 있다. AI 팩토리가 늘어날수록 GPU뿐 아니라 전력, 냉각, 발전 설비, 에너지 최적화 수요도 함께 늘어난다.
제조 현장 자체도 바뀐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기술을 활용해 반도체 공정 시뮬레이션, 계산 리소그래피, 팹 디지털 트윈, 자율 제조 체계를 고도화한다. 실제 공장을 가상 공간에 구현하고 AI가 설비와 물류 흐름을 최적화하는 방식이다. 앞으로 기업의 경쟁력은 제품을 잘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공장을 얼마나 빠르게 AI화하느냐로 옮겨갈 수 있다.
배 장관도 한국이 피지컬 AI를 중심으로 치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엔비디아가 이를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규모언어모델 경쟁에서 미국 빅테크를 따라가는 데 한계가 있었다면, 로봇·제조·자율주행·스마트팩토리와 결합한 피지컬 AI에서는 한국이 상대적으로 강점을 가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정부의 역할도 커진다. 황 CEO는 전날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엔비디아의 '코리아 AI 에코시스템 리셉션' 후 기자들과 만나 "AI 인프라가 전력, 인터넷, 컴퓨팅에 이은 차세대 기술이지만 막대한 자본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조선소, 반도체 공장, AI 공장 모두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산업이고 정부 지원이 있어야 번창할 수 있다는 취지다. 
배 장관은 한국이 GPU의 최대 구매자가 될 수도 있는 만큼, 엔비디아와 한국 정부가 AI 생태계 투자에 함께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GTC 코리아 개최도 긍정적으로 논의됐다고 했다.
다만 장밋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황 CEO는 엔비디아가 시장 점유율 80%를 차지하고 있고 매년 100%에 가까운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AI가 유용하고 수익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기업들이 AI 공장에 투자한다는 설명이다. 동시에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엔비디아 생태계 편입이 깊어질수록 플랫폼 의존도와 수익 배분 문제가 커질 수 있다.
국내 NPU(국산신경망처리장치)와 AI 서비스 생태계가 함께 성장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배 장관은 NPU가 올해부터 공공을 넘어 상용 레벨에서 글로벌 증명 단계에 들어갈 것으로 본다고 했다. 
업계 관계자는 "GPU 확보와 AI 팩토리 구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면서 "한국 기업이 직접 서비스와 모델, 운영 역량을 키우지 못하면 고가 장비를 사고 인프라를 제공하는 역할에 머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