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 이탈리아 모데나에 있는 페라리 본사를 방문한 조현준 효성 회장이 존 엘칸 페라리 회장의 집무실에서 환담을 나누는 모습 ⓒ효성
이탈리아 슈퍼카 업체 페라리가 한국을 전동화·디지털 기술과 럭셔리 시장 전략을 함께 개발할 핵심 파트너로 지목했다. 
삼성은 차량용 디스플레이를 공급하며 페라리의 전장 사업에 들어갔고, 효성은 국내 판매망과 고객 경험을 구축해 한국 사업을 10배 가까이 키웠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이 존 엘칸 페라리 회장과 각각 20년 넘게 이어온 인연이 양측의 사업 협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
베네데토 비냐 페라리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12일 열린 한국·이탈리아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한국은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시장이자 고향과 같은 국가”라고 말했다. 전동화와 디지털화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과 공동 연구·개발을 확대하자는 제안도 내놨다.
전날 세르지오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이 주최한 국빈 만찬에는 엘칸 회장과 이재용 회장, 조현준 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이탈리아 국빈 방문을 계기로 페라리와 한국 기업들의 오랜 협력 관계가 다시 주목받은 것이다.
페라리가 한국 시장에서 얻는 것은 자동차 판매에 그치지 않는다. 페라리는 올해 1월 한국 전통 말총 공예와 옻칠을 차량 디자인에 적용한 단 한 대의 ‘12칠린드리 테일러메이드’를 서울에서 공개했다. 지난달 서울 성수동에서 연 ‘카사 페라리’ 행사는 예약을 시작한 지 1시간 만에 약 2000명이 신청했다.
페라리는 신규 고객의 40%가 40세 미만일 정도로 고객층이 젊어지고 있다. 구매력과 유행 전파력을 동시에 갖춘 젊은 소비자가 많은 한국이 페라리의 브랜드 실험장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비냐 CEO도 “한국 고객들의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했다.
◆ 이재용·엘칸 27년 인연, 전장 사업으로 이어져
삼성은 차량용 디스플레이를 앞세워 페라리의 전장 공급망에 진입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2023년 4월 페라리와 차세대 자동차용 디스플레이 솔루션을 공동 개발하기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최근에는 페라리 신차 ‘루체’에 차량용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4종을 공급하기로 했다. 운전석 앞 디스플레이와 공조·미디어 제어 패널, 뒷좌석 제어 패널 등에 삼성 OLED가 적용된다. 자동차가 전동화되면서 주행 성능뿐 아니라 디스플레이와 소프트웨어,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차량의 상품성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페라리가 삼성의 OLED 기술을 선택한 것이다.
사업 협력의 배경에는 이재용 회장과 엘칸 회장의 오랜 인연도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탈리아 순방 당시 두 사람을 “27년 된 친구 사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과거 페라리 사외이사를 맡은 경력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엘칸 회장은 이탈리아 최대 기업 집단 중 하나인 아녤리 가문의 후계자로, 페라리와 자동차 업체 스텔란티스, 투자회사 엑소르 회장을 맡고 있다. 삼성 입장에서도 엘칸 회장과의 관계는 차량용 디스플레이뿐 아니라 반도체와 배터리, 전장 부품 등 자동차 사업 전반으로 협력을 넓힐 수 있는 연결 고리다.
◆ 효성 FMK 인수, 10년 만에 매출 10배
효성은 페라리와 한국 소비자가 만나는 판매·서비스망을 구축했다. 효성은 2015년 국내 페라리 공식 딜러사인 FMK를 인수한 뒤 서울 반포와 부산 해운대 등에 전시장을 열고 고객 체험 행사를 확대했다.
FMK 매출은 효성이 인수하기 전인 2014년 약 220억원에서 2025년 약 2160억원으로 늘었다. 10여 년 만에 10배 가까이 성장한 것이다. 국내 페라리 판매량도 이 기간 연평균 16.8% 증가했다. FMK는 2019년 페라리의 글로벌 딜러 네트워크에서 최우수 딜러로 선정됐다.
한국 시장의 위상도 높아졌다. 페라리는 2023년 6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브랜드의 과거와 미래를 소개하는 ‘우니베르소 페라리’를 열었다. 이탈리아와 중국에 이어 세계 세 번째이자 아시아 최초 행사였다.
효성과 페라리의 관계는 지난해 10월 합작법인 페라리코리아 출범으로 한 단계 더 깊어졌다. 글로벌 슈퍼카 업체가 국내 딜러사와 지분을 나눠 합작법인을 세운 것은 국내 수입차 업계에서도 이례적이다. 단순히 차량을 넘겨받아 판매하는 딜러 관계에서 한국 시장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파트너 관계로 바뀐 것이다.
조현준 회장과 엘칸 회장도 20년 넘게 교류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조 회장은 지난 2월 이탈리아 마라넬로의 페라리 본사에서 엘칸 회장을 만나 자동차 판매뿐 아니라 패션·소재 분야로 협력을 넓히는 방안을 논의했다.
페라리는 2021년 본사에서 패션쇼를 개최한 이후 의류와 생활용품 등 브랜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효성은 세계 1위 스판덱스 브랜드 ‘크레오라’와 친환경 섬유 브랜드 ‘리젠’을 보유하고 있다. 양측의 협력이 자동차 유통을 넘어 고기능성·친환경 섬유 분야로 확대될 가능성이 거론되는 이유다.
페라리가 한국에 보내는 잇단 ‘러브콜’은 총수 간 친분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삼성은 자동차의 디지털화를 구현할 기술을 제공하고, 효성은 한국에서 페라리의 판매와 브랜드 경험을 키워왔다. 페라리 입장에서 한국은 차량을 많이 파는 시장을 넘어 기술과 디자인, 마케팅 전략을 함께 시험하는 파트너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