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C,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 결정문 공개SK이노베이션, 미 대통령 거부권 기일 앞두고 마지막 기대업계 "거부권 명분 없어… 현대차-LG 처럼 빠른 합의 필요"
  • ▲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좌)와 SK이노베이션 배터리. ⓒ각 사
    ▲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좌)와 SK이노베이션 배터리. ⓒ각 사
    마무리되는 줄 알았던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간 배터리 갈등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최종판결에도 제자리걸음이다.

    ITC 최종판결의 확정되려면 미국 대통령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SK이노베이션이 이 과정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협상 테이블에 나서지 않으면서다.

    업계에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보고, 대승적 차원에서 양사 총수간 협의가 조속히 이뤄져야 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성장하는 산업군에 재를 뿌리기보다는 건설적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7일 업계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과 관련된 미국 대통령의 심의 기간은 4월11일까지다. SK이노베이션의 일부 배터리에 대해 10년간 미국 수입금지 조치를 내린 ITC의 판결은 60일간의 대통령 심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확정된다.

    앞서 지난 4일(현지시각) ITC는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간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 관련 최종 의견서를 공개했다.

    ITC는 SK이노베이션이 △BOM(원자재부품명세서) 정보 △선분산 슬러리 △음극·양극 믹싱 및 레시피 △더블 레이어 코팅 △배터리 파우치 실링 △지그 포메이션(셀 활성화 관련 영업비밀 자료) △양극 포일 △전해질 △SOC(충전율) 추정 △드림 코스트(특정 자동차 플랫폼 관련 가격 및 기술을 포함한 영업비밀 자료) 등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비밀 22개를 침해했다고 적시했다.

    2월10일 내려진 ITC의 최종판결로 양측의 합의가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승소한 LG에너지솔루션도 SK이노베이션에 협상을 재개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SK이노베이션은 응하지 않았다.

    SK이노베이션 측은 적극적인 합의에 나서기보다는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ITC의 10년 수입금지 명령이 무효가 되면서 SK이노베이션은 기사회생할 수 있다.

    실제 SK이노베이션은 대통령 거부권을 끌어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백악관을 대신해 ITC 결정을 심의 중인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수입금지 조치에 대한 우려의 입장을 전달했다.

    미국 내 총 50억달러 규모의 투자계획을 공개하며 10년의 수입금지 명령은 조지아주에서 건설 중인 전기차 배터리 공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조지아주에 짓고 있는 약 30억달러 규모의 1·2공장 외에도 20억달러의 추가 투자가 예정돼 있는데, 수입제한에 막혀 무산되면 지역 내 배터리 공급과 일자리 창출도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종판결 직후 바이든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행사해달라는 입장문을 발표한 데 이어 지난 5일 ITC 판결문이 공개된 직후에는 "ITC의 이번 결정은 수입금지 명령 등이 공익에 미치는 영향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를 비롯해 미국 전기차 배터리 산업의 경쟁력 저하, 시장 내 부당한 경쟁 제한 등 ITC 결정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을 대통령 검토 절차에서 적극 소명하고 거부권 행사를 강력하게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당장 선례가 없다. ITC가 설립된 1916년 이후 미국 대통령이 ITC의 결정을 무효로 한 사례는 다섯 차례 있었다. 하지만 영업비밀 침해와 관련한 거부권 행사는 단 한 번도 없다.

    또한 ITC에서 이미 일자리 창출이나 공정경쟁 등 공익을 염두에 두고 판결을 내렸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장승세 LG에너지솔루션 경영전략총괄 전무는 판결문 공개 후 진행한 컨퍼런스콜에서 "이번 판결 내용을 보면 미국의 전기차 산업을 보호하고 소비자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공익적 판단들이 구제조치 안에 아주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반영돼 있다"며 "공익까지 심도 있게 검토해서 나온 결정이고, 이런 부분이 수입금지 유예기간을 충분히 주는 형태로 나왔기 때문에 USTR이나 백악관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LG에너지솔루션이 공장을 짓고 있는 오하이오주 역시 영업비밀의 중요성과 공정한 결정을 요청하고 있다.

    오하이오주 상원의원들은 "LG에너지솔루션의 오하이오주 등 미국 내 성공적인 투자는 공정거래 및 영업비밀 보호가 바탕이 돼야 가능하다"며 "ITC가 2016년 의회에서 통과된 미국 영업비밀보호법(DTSA)을 통해 영업비밀 보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만큼 공정한 결정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 ▲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좌)와 SK이노베이션 배터리. ⓒ각 사
    게다가 바이든 정부가 지식재산권 보호를 중시하고 있는 만큼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공산이 커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정책 홍보 홈페이지를 통해 "미국의 성공적인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계획을 위해서는 당장 일자리뿐만 아니라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산업과 이와 관련한 일자리를 확보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불공정 무역과 미국의 지식재산권 탈취라는 관행의 근절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조지아주의 일자리 문제 역시 바이든 행정부에 큰 압박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지난 3일 라파엘 워녹 미국 조지아주 상원의원은 폴리 트로텐버그 교통부 차관 후보 청문회장에서 "ITC 결정은 SK이노베이션이 26억달러를 투자해 건설 중인 조지아주 공장 운영과 2600여명의 일자리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며 "바이든 대통령의 결정 과정에서 정책 목표인 녹색 교통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면밀한 분석을 요구한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이 경우 바이든 대통령이 추진한 1조9000억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책이 6일(현지시각) 상원에서 통과되면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진행 중인 경기부양책의 0.01% 수준의 투자비용 때문에 지식재산권과 관련한 정책 기조를 버릴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ITC가 SK이노베이션의 고객사인 포드와 폭스바겐에 각각 4년과 2년의 유예기간을 줘버려 바이든 대통령이 '공공의 이익 침해'를 이유로 거부권 행사를 할 명분마저 약화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2조달러 가까이 투자계획이 실행 중인 가운데, 50억달러 수준의 투자는 유의미한 의미가 있기 어려운 데다 지식재산권 역시 바이든 대통령이 '자기부정'을 하면서까지 거부권을 행사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담판 가능성이 부상하고 있다.

    앞서 전기자동차 코나의 리콜 비용 분담을 놓고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구광모 회장이 통 큰 합의를 이룬 것을 재계에서는 하나의 선례로 보고 있다.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도 리콜 비용 분담률을 놓고 기 싸움을 벌였으나, 두 총수가 물밑에서 접촉한 끝에 극적 타협을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각각 고려하고 있는 합의금 격차는 크게는 수조원대로 전해졌다. 총수간 합의 없이는 간극을 좁히기 어려운 수준인 셈이다.

    4대 그룹 총수의 정례 회동으로 재계 서열 최상위 기업간 교류가 그나마 원활한 편인 점과 이달 최태원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취임을 앞둔 점, 공생-사회적 가치 등을 주창해 온 점 등이 오랜 배터리 소송전의 총수간 합의 기대감을 높이는 대목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은 신규 사업 수주를 위해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하고, 코나 리콜 비용으로 지난해 적자를 낸 LG에너지솔루션은 연내 상장을 앞두고 있어 해당 리스크가 장기화할 경우 양사 모두 불이익이 적지 않을 것"이라며 "미 대통령 거부권 여부에 윤곽이 나오는 대로 합의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