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사 재정립의 필요성과 이승만과 4.19세력 간의 화해
    김충남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kimcn@sejong.org

    현대사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올바른 교육은 시급한 국가적 과제이다. 이를 위해 건국 대통령이며 한국 현대사의 중심인물인 이승만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역대 대통령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그는 1% 내외의 지지로 초라하기 짝이 없다. 정통성을 강화했다는 고교 역사 교재에 포함된 주요 인물 사진 등장 회수를 보면, 김구 28회, 김대중 12회, 박정희 10회이고 김일성(12회)과 김정일(11회)도 여러 번 등장하지만 이승만은 간략하게 서술했고 그것도 대부분 부정적이다.

    그 결과 젊은이들이 이승만보다 김일성을 더 잘 알고 있는 실정이다. 대다수 국민은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만 들었을 뿐 그에 대해 제대로 배운 바도 아는 바도 없다. 그러나 그의 역사적 위상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으면 한국 현대사도 제대로 정립될 수 없는 것이다.

     국사는 암기식 과목으로 전락된 지 오래일 뿐 아니라 선택과목이 되어 배우지 않아도 되었고, 이를 틈타 전교조 교사들은 왜곡된 역사관을 주입시켜왔다.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국이 국사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신채호는 "국민의 애국심을 환기시키려거든 완전한 역사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했고, 키신저는 "역사는 국가의 기억"이라고 했다. 기억상실증에 빠진 사람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듯이 역사의식 없는 국민은 국가공동체의 성숙한 구성원이 될 수 없고 보람찬 미래를 개척하기도 어렵다.
    또한 역사를 모른다면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도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며, 한미동맹이 왜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안보의 기적', '산업화의 기적', '민주화의 기적' 등 ‘3대 기적’을 이룩한 나라이다.
    그러나 사회 일각에서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패배한 나라” 등 자학(自虐)사관이 팽배해왔으며, 성공적인 국가발전을 이끌었던 지도자들도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같은 우리의 약점을 틈타 북한과 그 추종세력은 이 같은 부정적 역사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하여 역사는 존엄과 계승의 대상이 아니라 경멸과 청산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현대사를 둘러싼 논란과 갈등은 국민통합과 나라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더구나 한국은 북한과 이념경쟁, 정통성경쟁, 체제경쟁을 해왔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승리했을지 모르지만, 북한이 이념적인 면에서 우월하다고 믿고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취약점이 많으며 이러한 상태에서 통일을 주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또한 민주투쟁에 앞장 선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절대 가치로 삼으면서 건국과 호국, 산업화에 기여한 사람들의 공로를 무시하거나 폄하한 것도 이 같은 부정적 역사인식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국가건설(nation building) 차원에서 보면 건국과 호국, 산업화, 민주화는 모두 필수적인 과업이다. 건국과 호국 없이 산업화와 민주화도 어렵고, 산업화 없이 성숙된 민주주의도 어렵다. 건국과 호국, 산업화, 민주화라는 단계적 국가발전은 국가건설의 분업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상호 간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공로를 인정하고 미래를 위해 협력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식의 혼란은 교육정책은 물론, 대북정책, 통일정책, 한미동맹 등 국가 주요 정책에 혼선을 초래할 뿐 아니라 국론분열과 국력낭비 등으로 미래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가로막고 있다. 역사창조보다도 역사해석이 중요하다고 했듯이, 성공한 역사를 잘못된 역사로 보는 현상이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자유와 번영은 이승만으로부터 시작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한 노력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올바른 평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구한말 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통한 그의 역할 뿐 아니라 그는 임시정부 초대 주석, 초대 국회의장, 그리고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적극적인 리더십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탄생과 수호가 가능했다는 데 있다.
    미국은 소련과 타협하여 좌우합작에 의한 신탁통치 정부를 수립하려 했고 김구 등은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려 했던 상황에서 이승만의 올바른 판단과 용단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하기 어려웠다. 동유럽 국가들은 모두 좌우합작으로 공산화 되었고, 중국도 국공합작으로 공산세력이 승리했다.

    또한 아시아 대륙의 공산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공산화 되지 않은 것은 기적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의 강력한 반공지도력 없이 과연 가능했겠는가? 비판자들은 미국이 전쟁을 한 것이며 그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다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베트남에서 실패했는가? 미국은 이 대통령이 휴전을 반대했기 때문에 쿠데타를 통해 그를 제거하려 했지만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는 그가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포기한 바 있다.  

    또한 그가 쟁취한 한미동맹은 한국의 생존은 물론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튼튼한 울타리가 되었다. 그의 휴전반대, 단독북진 주장, 반공포로 석방 같은 탁월한 외교술이 없었다면 한미동맹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한국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미국이 월남과 동맹관계 없이 평화협정을 채결하고 월남전에서 발을 뺀 지 2년 만에 월남이 공산화되었다는 것은 한미동맹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이처럼 그는 건국과 호국은 물론 한미동맹의 쟁취를 통해 대한민국의 탄생과 생존과 번영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농지개혁과 교육혁명은 현대국가 건설의 토대가 되었다. 농지개혁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들이 지주 양반 중심의 봉건질서에서 벗어나 자유민이 되었다. 또한 2차 대전 후 교육혁명으로 성공한 나라는 한국뿐이다. 78%였던 문맹률을 10% 이하로 바꾸어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가 이룩한 한미동맹, 60만 국군양성, 교육혁명 등이 없었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혁명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승만 노선과 4.19정신은 같은 목표를 지향

    이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가 4.19기념일을 계기로 4.19묘지에 가서 사과하려던 것이 무산되었다. 4.19주도세력의 모임인 유세희 전 '4월회'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지나치게 추앙하려고 하면 4.19정신은 폄하될 수밖에 없다"면서 이인수의 사과를 거부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승만과 4.19세력은 역사적 화해가 가능하며, 대승적인 국가발전을 위해 시급한 일이라고 본다. 
     
     첫째, 임기 말 몇 년을 제외하고 이승만은 민주와 반민주, 진보와 보수라는 2분법에서 볼 때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지도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청년 이승만은 구한말 전제 군주제를 공화제로 바꾸려는 개혁운동에 앞장섰다가 6년 간 옥살이를 한 ‘민주투사’의 원조로서 4.19의거에 나섰던 젊은이들의 '큰 선배'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민주이념은 옥중 저서 『독립정신』에 집약되어 있으며,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은 그러한 이념의 소산이다. 건국과 6.25전쟁 등 긴박한 국내외 여건으로 인해 민주주의 원리를 위반한 적은 있지만, 그는 결코 민주주의를 부정한 적이 없다. 전시 하에서도 선거가 실시되었고, 국회는 년 평균 200일 정도 열렸으며 야당은 정부를 마음대로 비판했고, 언론자유도 상당 수준 허용되었다. 학교에서는 민주주의를 가르쳤고 남녀평등을 위한 조치들도 취해졌다. 그는 매주 정기적으로 국무회의를 주재했고 매주 내외신 기자회견도 할 만큼 민주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1960년 전후 고령으로 국정장악 능력이 떨어지면서 그가 자유당 실세들의  ‘포로’가 된 가운데 3.15부정선거와 4.19가 일어났었던 것이다. 부정선거가 4.19의 도화선이 되었지만 조병옥 후보가 병사함으로써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또한 4.19 이후 학생들의 의거를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칭찬하는 등 4.19의거를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았으며 학생들의 하야 요구를 받아들여 스스로 사퇴했다.

    그는 민주화 시위에 완강히 버티고 있는 중동 국가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주적 지도자'였던 것이다. 4.19 직후 고려대 홍승직 교수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4.19학생의거에 참가한 주된 동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유당 반대가 84.5%였고 이승만 대통령 반대는 11.3%에 불과했다는 것은 이를 웅변으로 말 해 주고 있다.

     둘째, 그의 공로는 구한말 개혁운동, 독립운동, 건국과 호국, 전후 복구 등 모두가 4.19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의 공로를 인정한다고 해서 4.19정신이 훼손될 이유가 없다. 4.19는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정부 공식행사를 하고 수시로 국가지도자들이 4.19묘지를 참배하며 광화문광장에는 4.19기념탑을 세울 만큼 널리 인정받고 있다. 또한 교과서를 통해서도 4.19정신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최근에는 4.19의 도화선이 된 마산시위일인 3.15까지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또한 근본적으로 보면, 이승만과 4.19 참여자들이 추구했던 것은 시간적으로 달랐을 뿐 내용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의 공과를 올바로 평가하자는 것은 그를 추앙하거나 그의 과오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4.19정신을 폄하해서도 안 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공적을 폄하해서도 안 된다. 왜냐 하면 모두가 너무도 중요한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6.25전쟁 중 개헌 등으로 독재를 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링컨도 남북전쟁 당시 독재자 또는 폭군이란 비난을 받았다. 링컨은 수많은 민간인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했고 수천 명을 재판 없이 투옥했고 야당의원들을 의회에서 추방했고 신문사 사장을 체포했으며 군인들을 선거에 개입하게 했다. 그는 "평상 시 헌법에 위배될지 모르지만 나라를 보위하고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그 같은 조치들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그러나 링컨은 미국 역사상 위대한 대통령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터키의 케말 아타투르크는 서구화 혁명을 주도했지만 사망 시까지 독재정치를 폈으며 특히 200-3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지만 절대 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영원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셋째, 대북정책과 통일을 대비한다는 차원에서도 이승만과 4.19의 화해는 절실하고 시급하다.
    그가 추구한 최고의 가치는 자유와 민주이며 그래서 북한주민을 해방시키는 것이 그의 필생의 염원이었다면, 4.19정신은 자유·민주·정의를 추구해왔기 때문에 북한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노선과 4.19정신은 합치되는 것이다.

    북한과 친북세력은 김일성의 정통성을 합리화하고 ’남조선혁명‘의 방편으로 이승만에 대해 ‘분단의 원흉’, ‘친미·친일·독재자 등으로 매도해왔다. 그러나 김일성이야 말로 참된 분단의 원흉이고 소련의 앞잡이였으며 3대 세습까지 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독재자이다. 따라서 4.19세력이 이승만에 대한 비난을 계속한다면 자유민주주의의 적인 북한에게 이용당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그의 개인적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일부 4.19 주역들은 물론 여론선도층을 중심으로 그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그들은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에 대해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정리했듯이 이승만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감이다. 또한 언제 닥칠지 모르는 통일은 물론 중국 등 주변국들의 영향력 확대에 대비하여 우리는 하루속히 국론을 모으고 국력을 키워야 한다.

     이승만 시대도 역사이고 4.19혁명도 역사이다. 이승만과 4.19세력의 화해는 역사의 화해이며 그것은 역사의 성숙을 의미한다. 이승만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바로 설 수 없다. 현대사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 4.19세력과 민주화세력은 대승적이며 역사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관용의 정신으로 용단을 내려야 할 때다.

    다행히 이명박 정부는 한국사를 고교 필수과목으로 정하고 교육내용도 개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국사학자들이 현대사 해석에 있어 보수와 진보로 팽팽히 맞서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결코 안심한 일이 아니다. 또한 한국사 교육의 성패는 대한민국 형성기인 이승만 시대를 제대로 반영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현대사의 올바른 정립과 교육을 위한 범국가적인 노력을 펼쳐 나가야 한다. 또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기념관과 동상이 있고 특히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의 기념관과 동상의 규모를 고려한다면, 임시정부 초대 주석, 초대 국회의장, 그리고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를 위한 기념관과 동상 건립은 만시지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