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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화학업계가 '석유화학산업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 감산에 나섰다. 공급은 넘치는 반면 수요는 위축된 이중고를 겪으면서 설비를 운영할수록 적자를 보는 상황이 이어지면서다. 다른 화학제품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1월 2주 에틸렌 가격은 톤당 775달러로, 호황을 맞았던 2018년 3분기 평균 가격 1240달러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4분기부터 톤당 700달러 초반을 지속한 에틸렌 가격은 1000~1100달러를 오갔던 2018년보다 300달러 이상 낮다.
화학업체 실적의 핵심인 에틸렌 스프레드(제품 가격에서 원재료 가격을 뺀 것)는 1월 1주 155달러를 기록, 지난해 4분기 평균 169달러보다 더 낮아졌다.
전문가들은 스프레드가 톤당 250~300달러 수준은 돼야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은 공장운영비와 인건비 등을 빼면 남는 게 없는 셈이다. 1월 2주는 215달러로 소폭 반등했지만, 여전히 순익분기점 이하다.한 화학업체 고위 관계자는 "한 때 반도체와 함께 한국 경제의 캐시카우 역할을 했던 화학제품의 업황이 급격하게 얼어붙고 있다"며 "국내 업체들은 에틸렌부터 최종 플라스틱 원료까지 생산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아직 회사 전체 적자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지만, 에틸렌의 수익성 악화가 장기화될 경우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석유제품인 나프타를 분해했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기초 유분인 에틸렌은 '석유화학산업의 쌀'로 불린다.
이를 기반으로 만드는 플라스틱 제품은 병뚜껑, 필름, 비닐, 식품용 포장랩, 의료용 수액팩, 차량 내장재, 전자기기, 기저귀, 마스크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만큼 원료인 에틸렌 가격은 화학업체 실적에 큰 영향을 미친다. 2018년 업계의 유례없는 호황은 이 같은 에틸렌 가격의 높은 스프레드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젠 반대 상황이 된 것이다.
마이너스 수익을 내자 화학업체들이 감산에 돌입했다. 국내 주요 화학업체들은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공장가동률을 90% 수준으로 낮춘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기업들이 물량 조절을 위해 감산한 적은 있지만, 국내 화학업체들이 업황을 이유로 감산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LG화학(연산 250만톤)은 이달 들어 충남 서산시 대산공장 유지보수 작업을 진행하면서 공장가동률을 낮췄다. LG화학 측은 "유지보수가 끝난 이후 감산을 이어갈 지에 대해서는 시장 상황을 보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케미칼(연산 220만톤)도 감산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고, SK종합화학(86만톤)도 향후 시황을 보고 감산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아시아 지역 업체들도 마찬가지다. 연간 294만톤을 생산해 온 대만 포모사는 이달 15일까지 10% 감산했다. 인도네시아 찬드라 아스리도 연간 90만톤 규모의 공장가동률을 최근 85%까지 내렸다. 연간 100만톤 규모를 생산하는 싱가포르 엑손모빌도 지난해 10월부터 80~85% 수준으로 가동률을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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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무역 분쟁으로 에틸렌 수요가 정체된 반면 미국과 중국의 에틸렌 생산 공장 가동률은 높아지면서 한국 등 역내 업체들이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이다. 한 때 한국산 에틸렌의 최대 수입국이던 중국은 최근 수년간 자체 에틸렌 생산설비 확장을 완료하면서 거의 수급 균형을 맞춘 상태다.
여기에 값싼 셰일오일·가스 기반으로 생산한 에틸렌이 아시아로 대거 유입되면서 가격 하락에 기름을 부었다. 아시아 업체들이 중동산 원유에서 생산된 나프타를 원료로 에틸렌을 생산하는 것보다 미국 업체들이 셰일가스에 함유된 원료로 에틸렌을 생산하는 게 원가 측면에서 크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 업체들이 셰일가스를 원료로 만드는 에틸렌은 우리나라 업체들이 나프타를 원료로 만든 에틸렌보다 절반 이상 저렴하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업계에서는 올해 1분기까지 전 세계 주요 국가에서 총 950만톤 규모의 에틸렌 설비가 신규로 상업가동을 시작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도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들 신규 증설 규모만 해도 지난해 세계 에틸렌 수요 증가분의 2.6배에 해당한다"고 우려했다.
최근 미중 무역 분쟁 완화 기조에 따라 구매심리 개선으로 화학제품에 대한 수요는 높아질 것으로 보이지만, 이 같은 글로벌 공급 증가세는 업황 개선을 억누를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미국-이란 분쟁 등 수요 충격으로 이어질 요소들도 남아있는 상태다.
최근 한국투자증권은 올해 평균 에틸렌 스프레드 추정치를 기존 톤당 353달러에서 195달러로 44% 대폭 낮추기도 했다.
한승재 DB금융투자 연구원은 "현재로서는 대형 크래커들이 가동률을 조정할 수밖에 없는 만큼 시황이 하락하거나 미중 무역 분쟁이 관세 연기가 아닌 철폐 수준으로 되는 등 수요 급반등이 있어야만 시황이 반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업계에서는 다른 화학제품 등 '에틸렌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화학업체 관계자는 "팔수록 손해인 지금과 같은 업황은 최근 10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라며 "국내 업계의 에틸렌 불황이 올해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고부가가치 플라스틱 제품, 합성고무 등 에틸렌 영향을 덜 받는 제품군 생산을 통해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평중 한국석유화학협회 본부장은 "가뜩이나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이 설비를 크게 늘려 내년까지는 국내 업계의 에틸렌 불황이 계속될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엘라스토머(플라스틱 소재의 일종)와 같은 고부가 제품을 개발하거나 아예 바이오·배터리 등 신산업을 키워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