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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에너지 수요가 줄어든 가운데 국제유가까지 폭락했다. 정유·석유화학업계의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정유업계의 경우 줄어든 정제마진에 재고평가손실까지 더해지면서 1분기 실적 악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석유화학업계는 글로벌 수요 위축이 심각한 만큼 단기 충격이 우려되고 있다.10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주 러시아의 반발로 산유국 추가 감산 합의가 불발되자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올해 2분기와 3분기 브렌트유 가격 전망을 배럴당 30달러로 낮췄으며 최저 20달러까지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6일 런던 ICE선물거래소의 5월물 브렌트유는 전일보다 9.50% 내린 배럴당 45.27달러로 마감한 상태다.
골드만삭스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의 석유가격 전쟁이 시작됐다"며 "코로나19로 석유 수요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벌어진 이번 상황은 미국 셰일을 겨냥했던 2014년 가격 전쟁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앞서 OPEC 회원국과 비회원국 모임인 OPEC+는 지난 주 오스트리아 빈에서 2분기 하루 평균 150만배럴을 추가로 감산하는 방안을 놓고 협상을 진행했지만,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들은 또 이달 말 종료되는 현재의 감산량(하루 210만배럴)에 대한 기간 연장에도 합의하지 못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중국 수요가 대폭 줄어들면서 추가 감산 방안을 논의했지만, 합의에 실패한 것이다.
특히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현행 감산 조치가 끝나는 4월부터 증산하고 원유 수출가격도 인하한다고 밝혔다. 저유가 시대로의 회귀가 점쳐진다.
통상 유가 하락은 원가경쟁력 확보로 이어지는 호재로 평가된다. 하지만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한 수요급감이라는 악재에 유가마저 하락하면서 엎친 데 덮친 꼴이다.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이르자 전날 SK이노베이션 주가는 전일대비 8.24% 하락한 9만9100원에 마감됐고, 같은 기간 에쓰오일은 6만4300원에서 5만8000원으로 9.80% 빠졌다. 이는 모두 52주 신저가다. SK이노베이션의 종전 52주 최저가는 10만700원이었으며 에쓰오일은 6만3700원이었다.
1분기 대규모 적자도 예상된다. 비싸게 산 원유를 낮아진 유가에 맞춰 싸게 팔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니 재고평가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통상 정유사들이 원유를 들여와서 정제해 판매하기까지 20~30일이 소요된다.
메리츠종금증권의 경우 SK이노베이션은 1분기 영업손실이 1458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으며 에쓰오일은 2186억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매출액 전망치도 하향 조정했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종전에 비해 33.2% 낮춘 9조733억원, 에쓰오일은 5조8277억원에서 5조2963억원으로 9.11% 내렸다.
노우호 메리츠종금증권 애널리스트는 "2월 이후 유가가 급락하면서 재고손실이 양사 합산 3283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데다 정제마진 악화와 수요 위축 등 부정적 변수를 감안해 실적 전망치를 하향 조정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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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주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배럴당 1.4달러로, 한 주 만에 0.9달러 하락했다. 정제마진은 휘발유를 비롯한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가격 등을 뺀 값으로 국내 정유사의 손익분기점은 배럴당 4달러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미 생산할수록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정제마진은 올 들어 회복 기미를 보였으나, 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한 2월2주부터 다시 내림세로 돌아섰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시장조사업체 IHS마켓이 올해 1분기 석유수요 감소 폭을 역대 최대인 전년동기대비 하루 평균 380만배럴로 추산하는 등 수요 위축이 우려되면서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 유가 급락 때는 시장수요가 탄탄한 채로 유가만 하락해 정유사들이 버틸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코로나19로 수요가 줄어든 상태"라며 "가뜩이나 한계에 달한 상황에서 유가 급락이라는 불확실성이 터지면서 언제 회복할 수 있을 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손실을 줄이기 위해 SK이노베이션 정유 부문 자회사인 SK에너지는 이달 울산 원유처리공장 가동률을 기존 100%에서 최대 85%까지 낮추기로 했다. 수요 감소를 고려한 현대오일뱅크는 이보다 앞선 지난해 말부터 가동률을 지난해 말 최대 생산량에 비해 90% 수준으로 낮췄다. 정유4사의 평균 가동률은 2018년 92%에서 지난해 85.3%로 급감한 상태다.
이미 국내 정유사들은 지난해 글로벌 경기 부진 속에서 과잉공급 부담에 가동률이 떨어진 상황이다.
지난해 3분기 현대오일뱅크의 정유 부문 가동률은 94.1%로 전년보다 4.8%p 하락했고, GS칼텍스·에쓰오일·SK에너지도 낮아졌다. 2018년 가동률이 전년대비 1%p가량 상승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수급 상황에 따라 통상 5%p 안팎의 범위 내에서 가동률을 조정하는데 지난해는 미중 무역 분쟁 여파로 시장 상황이 좋지 못했다"며 "코로나19로 인해 가동률을 유지하기에는 재고가 부담이지만 섣불리 낮추자니 사태의 장기화 여부가 불투명해 여러 방안을 놓고 고민 중에 있다"고 전했다.
석유화학업계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석유화학업체는 원유를 정제해서 만드는 나프타를 원재료로 제품을 만들기 때문에 나프타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코로나19 등으로 수요 감소가 계속되는 이상 제품 가격도 함께 내려 실적에 긍정적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석유화학업계 한 관계자는 "소비가 위축되면 플라스틱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원가 하락보다는 중국 등 주요 시장에서의 수요 감소에 따른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고 설명했다.
실제 LG화학의 경우 여수·대산공장 가동률을 95%로 내려 에틸렌 생산량을 줄인 상태다. 값싼 미국산 에틸렌이 다량으로 시장에 공급되고 중국은 생산량을 늘린 가운데 코로나19 탓에 글로벌 수요는 대폭 감소하면서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이 제품을 팔수록 손해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변수는 미국 셰일가스 업체의 생산 여부다. 유가를 둘러싼 '치킨게임'이 심해지면서 미국 셰일가스 생산이 줄어든다면 미국발 석유화학제품 공급 증가 폭도 완화될 수 있다.
셰일가스는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기준 배럴당 55~65달러 수준이 유지돼야 안정적 투자가 가능한데, 저유가가 지속되면 셰일가스를 원재료로 하는 미국과 중국의 석유화학 설비 증설이 지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 셰일가스에서 뽑아낸 에탄으로 에틸렌을 만드는 분해설비(ECC)가 늘면서 국내 석유화학업계가 과잉공급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도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가격 하락기 발생하는 수요 위축이 악재이긴 하지만, 원재료인 원유가격 하락은 결국 낮은 원가를 의미한다"며 "미국 셰일업체가 침체되고 WTI가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인다면 석유화학산업의 중장기적 원가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