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여러번 위기 넘기며 사업 키워.. 뉴데일리경제 박정규 대표 칼럼
  • ‘적당히 어물쩍 해서 성공하는 사업은 단 하나도 없다. 목숨을 걸어라!’

     

    최고의 신제품이라는 확신으로 시장에 제품을 내놓아 히트를 치면 곧바로 경쟁제품이 쏟아져나온다. 성공의 단꿈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경쟁자들과 치열한 레드오션 전쟁을 벌여야 한다.

     

    더욱이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가 시시각각 오픈되는 오늘날 글로벌 시장은 말할 나위도 없다. 소비자들이 1달러라도 더 싼 제품을 구입하기 위해 마우스 하나로 해외에 물건을 직접 구매까지 하는 세상이다. CEO와 임직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총력전을 펴지 않으면 기업은 경쟁에서 낙오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정주영 고 현대그룹 창업주는 종종 임직원들에게 ‘성공하려면 목숨을 걸 정도의 정열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실제로 직접 국내외 현장을 누비며 숱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 전쟁 한복판에서 목숨 걸고 벌인 베트남 공사

     

    정주영 회장은 1960년대 초 국내 시장이 좁아 해외로 나가지 않으면 기업이 성장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

     

    갖은 노력 끝에 현대건설은 1965년 태국 파티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수주하면서 한국 건설업 사상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첫 진출한 태국에서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하지만 태국을 시작으로 영하 40도의 알래스카 산 속의 교량 공사, 파푸아뉴기니의 지하 수력발전소 공사, 월남 캄란 군사기지 공사 등 위험천만한 공사들을 계속 수주하며 영역을 넓혀나갔다.

     

    공사 장비는 대부분 국내 도로공사에서 사용되던 구형 기계들이었다. 최신식 장비를 구입해봐도 사용 방법을 모르는 기능공들이 두 달도 못돼 고장내기 일쑤였다.

     

  • ▲ 수려한 경관의 메콩강 유역. 그러나 이곳은 1970년대 치열한 격전장이었고 현대건설 직원들은 목숨을 담보로 사업을 폈던 곳이기도 하다ⓒ
    ▲ 수려한 경관의 메콩강 유역. 그러나 이곳은 1970년대 치열한 격전장이었고 현대건설 직원들은 목숨을 담보로 사업을 폈던 곳이기도 하다ⓒ

    현대건설이 월남까지 공사 영역을 넓히던 중, 메콩강 삼각주 하구를 준설하던 미국 준설선 8천마력짜리 자메이카호가 베트콩이 장치한 폭발물에 의해 침몰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은 예하부대에 자메이카호의 임무를 대신할 준설선을 찾으라는 급명령을 내렸고, 현대에 기회가 왔다. 하지만 그 곳은 전쟁터 한 복판이어서 그 기회는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사정이 너무나 절박했던 스미스 소장은 정회장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반드시 참여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정회장이 직원들의 안전 때문에 슬그머니 뒷꽁무니를 빼려하자 총으로 위협하면서 강요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숲에서는 베트콩이 24시간 잠복해 있었고, 밤이면 조명탄이 연달아 터졌다. 그 와중에 현대건설은 메콩강 토사를 퍼올려 주변 숲을 덮어야 했다. 죽음을 등에 업은 채 천신만고 끝에 1년 반 만에 약속한 공사를 마쳤다.

     

    미군은 메콩강 삼각주에서 300km 쯤 떨어진 빈롱, 붕타우 항로 준석작업도 현대에 맡겼다. 베트콩과 월남군이 강의 양 연안에 대치해 서로 상대편을 향해 포탄이며 총알을 정신없이 퍼부어대는 와중에서 강 한복판에 있는 현대건설 직원들은 헬리콥터가 날라다주는 비상 식량으로 허기를 메우며 작업을 했다.

     

    현대건설의 베트남 사업은 하루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여나간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울산 현대중공업 현장 지프 타고 돌다가 바다로 추락

     

    정주영은 1970년대 초반 울산에 조선소를 건설할 당시 서울에서 울산, 울산에서 서울, 다시 서울에서 울산... 그런 식으로 울산에서 반, 서울에서 반을 정신없이 보냈다.

     

    울산에서 잘 때는 새벽 4시에 숙소에서 나와 2시간 동안 현장 구석구석을 샅샅이 돌아보고 6시면 간부회의를 소집해 그날 할 일을 지시하곤 했다.

     

  • ▲ 현대중공업 선박 건조장의 정주영 고 현대그룹 회장ⓒ
    ▲ 현대중공업 선박 건조장의 정주영 고 현대그룹 회장ⓒ

    1973년 11월 어느날. 새벽 3시쯤 강한 바람 소리에 잠이 깼는데 밖은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공장이 걱정돼 지프를 몰고 현장 시찰을 나섰다. 차를 몰고가다가 옆 건조부에서 당직 중이라는 직원 이정일(훗날 미포조선 사장)을 차에 태우고 계속 돌았다.

     

    중도에 이정일에게 다른 일을 맡기고는 혼자 지프를 몰면서 시찰을 계속했다. 와이퍼가 부지런히 빗물을 닦아내고 있었지만 워낙 거세게 퍼붓는 비로 앞이 거의 안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수도 없이 돌았던 길이어서 눈 감고도 다닐만큼 익숙한 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헤드라이트 불빛 안으로 커다란 바위 덩어리 한 개가 불쑥 막아섰다. 전날에는 분명히 그 자리에 없었고,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바위였다.

     

    얼떨결에 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돌렸는데 차가 뛰쳐오르며 그대로 바다로 곤두박질 해버렸다.

    수심이 12m나 되는 물에 막힌 지프는 다이빙을 한 것처럼 쑤욱 가라앉더니 다시 떠올랐다.

     

    자동차의 문을 모두 닫고 있었기 때문에 물이 금방 차 안으로 새어 들어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동차는 일단 떠올랐다가 서서히 물이 차면서 다시 가라앉게 될 상황이었다.

     

    그는 속으로 ‘문이 안 열리면 앞유리를 깨고 나가면 될 것’이라며 침착하게 위기를 탈출하려 생각했다. 그러나 엑셀러레이터 구멍과 같은 밑바닥의 연결부위부터 물이 빠르게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을 밀어보았으나 수압 때문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써서 두 발로 조수석 쪽의 문을 살짝 열어 물이 들어오게 한 다음, 어느 정도 물이 차자 힘껏 문을 밀어제친 후 쏟아져 들어오는 물살을 헤치며 자동차 밖으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물살과 사투하는 사이 자동차는 육지에서 800여 미터나 떠밀려가 있었다. 사력을 다해 헤엄쳐 육지로 올라왔다.

     

    초겨울의 비바람 몰아치는 바다 날씨는 온 몸을 얼게 만들었다. 초소가 보이기에 소리를 질렀는데 천만다행히도 경비가 있었다.

     

    “야~!” (정회장)
    “누구요?” (경비)
    “나야” (정회장)
    “나가 누구요?” (경비)
    “이놈의 자식, 누군지는 알아서 뭐해! 빨리 밧줄 가져와!”

     

    소리를 버럭 질렀더니 경비가 정회장을 알아봤다.

     

    “아이고, 회장님이십니까? 그런데 왜 거기 계신데요?”
    “야 이 자식아 빨리 밧줄이나 갖고 와!”
    “예...그런데 갑자기 밧줄이 어디 있나요...”

     

    당황한 그가 여기 저기 뒤져서 밧줄을 찾아 온 시간이 5분 남짓이었다는데 정회장에게는 1시간도 넘는 것 같았다.

     

    욕은 실컷 퍼부었지만 정회장은 그 경비가 아니었으면 졸지에 저 세상 사람이 될 뻔 했다. 정 회장은 훗날 “조물주가 일을 더 하고 저승으로 오라고 한 번 더 기회를 준 것 같았다”고 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