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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약품그룹의 지주사 한미사이언스에 연초부터 회계처리 문제로 악재가 터졌다. 외부감사인인 한영회계법인이 지난 2011년부터 한미사이언스가 한미약품을 관계사로 처리한 것이 잘못됐다고 주장한 것이다. 특히 이번 사건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고의 분식회계 의혹 사건과 비슷하게 자회사에 대한 실질 지배력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곱씹어볼 만한 부분이 많다.
한미사이언스는 지난 2010년 7월 한미약품에서 인적분할을 통해 지주사로 전환됐다. 한미사이언스는 2010년에는 한미약품에 대해 '실질 지배'를 근거로 '주요 종속회사'로 분류했었다.
그러다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이 적용된 2011년부터는 한미사이언스가 보유한 한미약품의 지분율이 50% 이하이기 때문에 지배력이 없다고 판단해 연결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 과정에서 일회성 지분법 투자 손실 97억 3736만원이 발생해 영업흑자가 영업적자로 전환됐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의 분식회계 혐의에서는 비껴간 셈이다.
한영회계법인은 실질 지배력을 이유로 한미사이언스가 한미약품을 관계회사가 아닌 종속회사로 회계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미사이언스와 한미약품 이사회 구성이 같고, 소액주주의 주주총회 참석률이 낮아 한미약품에 대한 한미사이언스의 실질 의결권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한영회계법인의 의견대로라면 한미사이언스는 지난 2011년 이후 공시한 재무제표를 모두 수정해야 한다. 해당 기간의 재무제표에 대해 '적정' 의견을 제시한 안진회계법인과 삼일회계법인도 책임 논란에 맞닥뜨리게 됐다. 한미사이언스로서는 10년 가까이 적정하다고 판단됐던 회계처리에 대해 갑자기 다 뜯어고치라고 하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미사이언스의 자회사 한미약품에 대한 회계처리를 종속회사에서 관계회사로 전환한 것에 대해 사후에 실질 지배력을 근거로 회계처리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가 되어버린 회계처리. 삼성바이오로직스 고의 분식회계 사건과 맞닿는 지점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 2016년 11월 코스피 상장을 앞두고 2015년 12월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종속회사에서 관계회사로 전환했다. 미국 바이오젠이 2015년 당시 콜옵션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지배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해서다.
한미사이언스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자회사 회계처리 양상은 비슷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회계처리 이후 오히려 적자 전환한 한미사이언스와 달리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경우 해당 회계처리를 통해 4조 5000억원 규모의 자산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이 같은 회계처리가 적법한지에 대해 금융당국에 문의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한국공인회계사회 위탁감리 외에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까지 참석한 질의회신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문제없다는 판단을 받았다. 다수의 회계 전문가들에게 회계처리가 적법하다는 의견도 받았다.
이후 금감원은 지난 2018년 5월 직접 감리를 실시한 결과 분식회계 혐의를 찾았다고 말을 바꿨다. 같은해 11월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이하 증선위)까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가 고의였다는 최종 결론을 내리면서 양측은 행정소송에 돌입하게 됐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행정소송에서 패소하면 2012~2014년의 삼성바이오에피스 재무제표를 재작성해야 한다.
한미사이언스는 한영회계법인과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정례 연석회의에 질의서를 제출하게 됐다. 회계기준원과 금감원은 지난 29일 오후 연석회의를 진행한 후 당사자들이 회계기준서에 따라 자체 판단을 하라는 애매한 답변을 내놨다.
더 큰 문제는 연석회의에서 나온 의견이 나중에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도 연석회의에서 '문제 없는 회계처리'라는 답을 받았으나 나중에 '그 당시에는 제한된 정보로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최종 의견이 아니었다'라고 말이 바뀐 바 있다.
이 같은 일이 한미약품그룹에만 벌어지고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업계의 우려를 키우고 있다. 제약·바이오 업계에는 지난 2001년 국내 제약사 최초로 헬스케어와 제약 부문을 분리한 녹십자를 시작으로 대웅제약, JW중외제약, 한미약품, 동아제약, 종근당, 일동제약, 신풍제약, 휴온스 등이 지주사로 전환했다. 해당 업체들에도 비슷한 잣대를 들이대면 문제의 소지가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나날이 회계법인의 감사가 깐깐해지고 있는 것도 업계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회계법인으로서는 향후 문제가 발생할 경우 책임지는 일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감사를 더욱 까다롭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감사를 맡았던 삼정회계법인과 안진회계법인은 증선위의 고의 분식회계 판정 이후 징계를 받은 바 있다.
근본적으로는 K-IFRS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해 반복되는 일이다. 회계학계에서는 K-IFRS 도입 전부터 이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해 왔다. K-IFRS는 원칙 내에서 기업과 회계 전문가의 회계처리 판단에 대한 재량과 책임을 보장하는 회계처리 방식이다. 다양한 산업계의 특성에 따른 회계처리를 존중하기 위해 지난 2011년 국내에 전면 도입됐다.
도입 취지와 달리 기업들은 회계처리에 의문이 생기거나 회계법인과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면 금융당국의 판단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기업이 자율적으로 판단했다가 문제가 생길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감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기존 회계법인과 현재 회계법인의 의견이 다르면 결국 금감원에 물어볼 수밖에 없다"며 "기업이 자율적으로 해석해서 회계처리하는 게 아니라 기관에 물어보고 답하는 것으로 되니까 사실상 K-IFRS라고 할 수가 없다"고 꼬집었다.
K-IFRS가 정착하기 위해 규제감독기관이 명확하고 합리적인 가이드라인을 내놔야 한다. 업계에서도 이번 일을 계기로 금융당국이 확실한 기준을 제시해주길 바라고 있다.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제약·바이오 업계도 산업 규모 성장에 따라 회계처리 투명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