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로 아도서비스공장 전소 ‘반드시 된다’ 신념으로 전화위복 [뉴데일리경제 박정규 대표 칼럼]
  • ‘자동차 생산 800만대. 영업이익 세계 자동차업계 5위. 브랜드가치 100억달러...’

     

    오늘날 현대자동차의 위상을 나타내는 지표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창업주가 자동차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현대차가 이 시대 세계 최고 브랜드들과 각축을 벌이라고는 우리 정부도, 기업들도, 심지어 본인조차 가능한 일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조건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차 사업에 도전하고, 대를 이어 ‘품질경영’을 기치로 내 건 정몽구 회장의 글로벌경영 전략이 오늘의 현대차를 만들었다는 평가다.

     

    정 회장이 자동차사업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40년 만든 ‘아도서비스’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 공장은 한 달도 못돼 불바다에 휩싸이고 만다. 정주영은 이 화재 사고로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피눈물을 머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재기를 모색하고 갖은 우여곡절을 거쳐 본격적인 자동차 사업을 펼쳐나가게 된 것이다.

     

    ▶자동차 수리공장 인수하자 잿더미로

     

    1934년 인천 부두 노동자로 일하다 서울에 올라와 쌀가게 ‘복흥상회’ 점원으로 취직한 정주영은 2년 만에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받게 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간판을 ‘경일상회’로 바꿔달고 부지런히 고객을 늘려가던 중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2년 후에는 쌀 배급제가 시행되면서 전국의 쌀가게가 일제히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가게를 정리한 그는 수중에 있던 800여원을 밑천으로 할 만한 사업을 찾던 중 자동차 엔진 기술자였던 이을학씨 등의 도움으로 아현동 고개에 있는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게 됐다. 아도서비스는 법률적으로 현대자동차의 모태는 아니었지만, 정주영 회장 입장에서는 자동차사업에 눈을 뜨게 해준 정신적인 모태였다.

     

  • ▲ 아산의 아도서비스공장은 인수 직후 화재로 전소해버렸다. 그림 출처= http://cafe.naver.com/ilovesuksu/15989ⓒ
    ▲ 아산의 아도서비스공장은 인수 직후 화재로 전소해버렸다. 그림 출처= http://cafe.naver.com/ilovesuksu/15989ⓒ

    1940년 3월 1일 계약한 뒤 공장을 접수한 그는 신나게 밤 잠도 안자고 일했다. 이을학씨가 워낙 이름난 기술자여서 고객들이 날마다 밀려들었다. 정회장은 공장 입구에서 큰소리로 인사하며 고객들을 맞았다.

     

    그러나 세상사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3월 20일께 잔금을 치른 지 닷새 만에 공장에 불이 나고 말았다. 
     
    당시는 공장에서 숙식할 때였는데, 새벽에 일어나 세수할 물을 데울 불을 피우려고 옆에 있던 신나통을 화덕에 조금 부었는데, 그 순간 불길이 신나통으로 옮겨 붙었고 곧바로 기름에 절은 목조 건물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게 됐다.

     

    화마는 공장도, 수리를 맡아놓았던 트럭 5대와 올스모빌 승용차 등 고객들의 자동차도 모두 태워버리고 말았다. 정주영은 흉물스럽게 형체만 남은 공장에다 졸지에 엄청난 빚까지 떠안게 됐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 이대로 좌절할 것인가...

     

    하지만 정주영은 좌절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길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쌀가게 할 때, 또 아도서비스를 인수할 때 돈을 빌려줬던 오윤근 씨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동안 정주영의 신용을 높이 평가했던 오씨는 사정을 듣자 3천5백원을 선뜻 빌려줬다.

     

    그는 빌린 돈으로 신설동 빈터에서 무허가로 자동차 수리공장을 시작했다. 무허가다 보니 하루하루 살얼음판 같은 날이 지속됐다. 낮에는 돌아다니면서 고객들을 만나고, 밤에는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기름 범벅이 돼 밤새워 일했다. 그 덕에 그는 자동차의 모든 기능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게 됐다.

     

    신설동의 아도서비스 공장은 대성공이었다. 오윤근씨에게는 원금과 이자까지 갚았다.

     

    아도서비스의 성공은 여기까지였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2년 기업정리령을 내렸고 ‘아도서비스’는 종로의 친일기업이던 ‘일진공작소’와 강제 합병시켰다.

     

    정주영은 이후 광산 운수업으로 돌려 사업을 지속했다. 이어 1945년 해방된 후에는 미 군정청이 적산 일부를 불하할 때 중구 초동의 200여평을 불하받아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을 걸고 자동차 수리공장을 시작했다. 

     

    미군 병기창에서 엔진을 바꿔다는 일 등을 맡다가, 1년쯤 뒤부터는 일제 고물차를 용도에 따라 개조하는 일도 했다. 10명으로 시작했던 종업원이 금새 30명, 1년만에 80명으로 불어났다.

     

    1947년에는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사’ 간판도 함께 달았다. 건설업에 뛰어들기 위해서였다.

    그는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는 등 의욕 넘치게 두 사업을 병행하려 했으나, 6.25 전쟁이 터지면서 모든 계획이 바뀌게 됐다.

     

    정주영은 6.25 이후 미군 하청사업, 전후 복구사업 등 건설업에 전념하게 된다. 60년대 들어서는 해외건설에 진출하는 등 한국 건설사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갔다. 

     

    ▶ ‘코피나’ 악평에 시달린 현대차의 첫 작품 ‘코티나’

     

    청년시절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로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던 정주영은 자동차 사업의 꿈을 펼칠 기회를 찾던 중 정부가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자동차산업을 포함시켰다는 내용을 접하고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 ▲ 현대차가 첫 출시한 코티나. '코피나'라는 악평에 시달렸다ⓒ
    ▲ 현대차가 첫 출시한 코티나. '코피나'라는 악평에 시달렸다ⓒ

    그는 1967년 ‘현대자동차’ 설립 허가를 받고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자동차 보유대수는 5만대 수준이었고, 삼륜차를 생산하던 ‘기아’와 승용차시장을 독점하던 ‘신진’ 외에는 전무한 상황이었다.
     
    현대는 미국 포드자동차와 합작을 추진했다. 그러나 합작은 처음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건설업체인 현대를 쳐다볼 리 만무했다.

     

    우여곡절 끝에 합작에는 합의했지만 부지 매입부터 어려움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자동차 공장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울산공장 부지의 땅값이 폭등했다.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덥치면서 이 일대 침수사태가 발생하자 농민들이 낫과 곡괭이를 들고 와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어렵사리 공장을 짓고 드디어 첫 차 ‘코티나’를 출시했다. 그러나 코티나는 비포장도로가 많은 도로를 달리다 중도에 엔진이 꺼지기가 일쑤였다.

     

    ‘코티나는 코피나’, ‘섰다하면 코티나’, ‘밀고가는 차 코티나’ 등등 조롱 섞인 말들이 난무했다. 심지어 부산사업소 앞에서 코티나 택시 100여대가 경적을 울리며 자동차 반납을 요구하기 시작, 전국적으로 승용차, 트럭, 버스 반납 소동으로 이어졌다. ‘현대차는 똥차’라는 오명이 정설이 되고 말았다.

     

    1969년 9월에는 울산 지역에 유례없는 대홍수가 현대자동차 공장을 덮쳤다. 침수로 인해 공장은 초토화돼버렸다. ‘현대가 물에 빠졌던 코티나를 판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현대는 더 이상 잃을래야 잃을게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됐다.

     

    월급이 몇 달씩 밀리는가 하면 아우 정세영과 담당 임원들이 날이 새면 돈을 꾸러 다니면서 하루하루 부도를 막아가는 지경이었다. 세금을 못내 전국 최고 체납자로 신문에 발표되기도 했다.

     

    포드와는 엔진조립공장 50:50 합작 문제로 장기간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현대는 결국 포드와의 합작을 철회하고, 미쓰비시 엔진을 들여와 자동차를 독자생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1974년 7월. 현대는 1억달러를 쏟아부어 연생산 능력 5만6천대 규모의 국산 종합 자동차공정 건설에 착수, 1년 반 만인 1976년 1월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PONY)'를 출시했다.

     

    에너지 파동을 겪은 세계시장에서 포니는 60여개국에서 날개돗친 듯 팔려나갔다. 정회장에게 ‘포니’는 말로 설명조차 하기도 싫을 만큼 난관을 뚫고 탄생한 옥동자였던 것이다.

     

  • ▲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에게 포니는 난산 끝에 얻은 옥동자와 같은 존재였다.ⓒ
    ▲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에게 포니는 난산 끝에 얻은 옥동자와 같은 존재였다.ⓒ

    마치 진흙밭 비포장도로와 깊은 계곡, 정글, 산비탈을 헤매듯 극심한 진통을 거듭했던 현대자동차는 ‘포니’ 이후 포장도로에 올라서 질주하기 시작했으며, 자동차의 핵심인 ‘엔진’을 들여왔던 미쓰비시를 추월하기에 이르렀다.

     

    현대자동차는 장남 정몽구 회장이 이어받아 기아자동차와 합병한 이후 초고속 성장을 거듭, 오늘날 세계 초일류자동차 기업들과 각축을 벌이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정주영 회장의 불같은 정열과 확신이 없었으면 잉태 단계에서 사라졌을 기업이었다.

     

    “나는 무슨 일을 시작하든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추진한다.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 외에 ‘안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은 단 1퍼센트도 갖지 않는다.” - 정주영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