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황 부진-코로나19 등 겹악재GSC-현대오일-에쓰오일 자금조달흥행실적 악화 우려 불구 기대 이상의 투자 수요 확보 평가 잇따라
  • ▲ SK 울산 CLX. ⓒ성재용 기자
    ▲ SK 울산 CLX. ⓒ성재용 기자

    미국과 이란간 신경전, 중국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역마진에 이어 국제유가 폭락까지 겹치면서 연초 정유업계에 신용등급 강등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회사채 발행에 잇달아 성공하면서 자금조달 부분에서 만은 숨통이 트이는 모습이다.

    12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에쓰오일이 4000억원 규모 회사채 발행을 위해 2일 기관투자자를 상대로 진행한 수요예측에서 총 1조1400억원의 매수 주문이 몰렸다. 9500억원어치 주문이 쏟아졌던 2018년 7월 회사채 청약 기록을 깨고 창사 이래 최대 수요를 모집했다.

    실적 악화 우려 속에서도 기대 이상의 투자 수요를 확보했다는 평이다. 에쓰오일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4200억원으로, 전년 6394억원에 비해 34.3% 감소했다. 미-중 무역 분쟁 등으로 석유제품 수요가 감소한 여파가 컸다. 올해도 코로나19 확산과 이에 따른 국제유가 하락으로 쉽지 않은 경영 환경에 놓여 있다.

    기관들은 신규 자금 운용을 위해 올해 초부터 적극적으로 신용등급 'AA-' 이상인 우량 회사채를 사들이고 있다. 특히 기업 실적이 나빠지고 신용등급도 하락세가 강해지면서 위험 회피를 위해 우량 회사채를 담으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코로나19 등으로 안전자산 선호현상으로 채권금리가 내려갔지만, 투자자들이 수익률보다 안정성을 선호하다보니 AA급을 향한 투자심리는 견조하다"고 설명했다.

    에쓰오일의 신용등급은 10개 투자적격등급 중 두 번째로 높은 'AA+(안정적)'다. 탄탄한 대주주를 두고 있다는 점도 투자수요를 모으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 아람코가 에쓰오일의 지분 63.41%를 보유하고 있다.

    이인영 나이스신용평가 수석연구원은 "국내 주요 정유·화학기업으로, 규모의 경제를 보유했으며 최대주주인 사우디 아람코의 극히 우수한 대외신인도 등에 기반한 재무적 융통성이 신용도를 지지하는 주요 요소"라고 분석했다.

    수요예측에서 흥행몰이에 성공한 에쓰오일은 당초 계획보다 증액한 6800억원을 발행했다. 에쓰오일은 이번에 조달한 자금을 10월까지 차례로 만기가 도래하는 차입금을 상환하는데 사용할 계획이다.

    이에 앞서 올해 정유사 가운데 처음 회사채 발행에 나선 GS칼텍스도 1조원이 넘는 투자수요를 모으는데 성공한 바 있다. 2월5일 GS칼텍스가 25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 진행한 수요예측에 총 1조2900억원의 매수주문이 몰린 것. GS칼텍스는 같은 달 13일 당초보다 증액된 40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 차입금 상환 등에 활용했다.

    최근 유가와 정제마진 하락에도 우수한 시장 지위와 사업기반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 2위 정유사로서 국내 주유소 시장점유율 21%, 내수 경질유 판매량 점유율은 25%에 이른다. 때문에 실적에 민감한 투자 기조 속에서도 투심이 흔들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어 현대오일뱅크도 수요예측에서 계획 물량의 세 배 규모인 9000억원의 매수주문이 몰리면서 2000억원 증액한 5000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IB업계 관계자는 "업황이 침체됐음에도 현대오일뱅크의 지난해 실적은 선방한 편"이라며 "점진적으로 설비를 증설해 고도화비율이 40%를 웃도는 등 생산효율성이 업계 최상위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다 비정유 부문으로 사업 기반을 확대하면서 투자자에게 안정성을 인정받았다"고 판단했다.

  • ▲ 충남 서산시 소재 현대오일뱅크 대산공장. ⓒ현대오일뱅크
    ▲ 충남 서산시 소재 현대오일뱅크 대산공장. ⓒ현대오일뱅크

    이처럼 회사채 시장에서 수요가 대거 몰리면서 업황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 정유업계에서는 유가가 장중 20달러대까지 급락하면서 수년 전 겪었던 정유사 신용등급 줄하향 사태가 재현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2013~2014년 유가가 100달러대에서 30달러대로 급락할 당시 미국 셰일가스업체들은 줄도산했고, 국내 정유사들도 타격을 입었다.

    연초부터 미국-이란 무력 충돌 등 외부 변수에 시달려온 정유업계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유가가 출렁이면서 중장기 전망까지 불투명해진 것이다. 실제 정유업계는 올 들어 성과급을 대폭 줄이고 에쓰오일 등의 경우 창사 첫 명예퇴직을 추진하기도 했다.

    신용평가업계 한 관계자는 "정유사들이 투자 부담에 노출된 가운데 실적이 좋지 않고 각 업체별로도 안고 있는 문제들이 있다"며 "현 유가 수준에서도 정유사들은 평가손실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골드만삭스는 2분기와 3분기 브렌트유 가격 전망을 배럴당 30달러로 낮췄고, 최저 20달러까지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골드만삭스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의 석유가격 전쟁이 시작됐다"며 "코로나19로 석유수요 감소가 예상되는 가운데 벌어진 이번 상황은 2014년 가격전쟁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짚었다.

    신평업계 관계자는 "유가가 20달러대로 떨어진다면 정유사들은 조 단위 평가손실을 기록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코로나19로 금융·부동산 등 투자시장이 전방위 침체를 겪으면서 우량으로 판단되는 기업에 대한 회사채 수요가 급증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금융투자협회 '2020년 2월 장외채권시장 동향' 자료를 보면 코로나19 확산으로 금리가 하락하고 기업의 선제적 장기 자금수요가 증가하면서 회사채 발행이 2월 회사채 발행은 12조3000억원 규모로, 1월에 비해 5조5000억원 증가했다. 수요예측 금액은 총 73건, 6조5300억원으로 집계됐다.

    특히 정유업의 경우 불황에 강하고 호황에 호실적을 내면서 투자자들의 신뢰가 높은 편이다. IB업계 관계자는 "정유사는 안정성이 높다고 판단, 일단 믿고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정유업체들은 한 숨 돌리게 됐다. 당장 비용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목표보다 증액에 성공한 만큼 코로나19 위기를 감내할 시간을 번 셈이다. 발행금리가 시장금리 하락으로 낮아지면서 이자비용 부담도 덜었다.

    코로나19로 실적 부진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자금조달마저 실패한다면 차환 비용 등으로 더 큰 상환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최악의 경우 '돈맥경화' 해소를 위해 자산매각과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코로나19가 단기 악재를 넘어 구조적 충격으로 확산된다면 업계 판도까지 흔들 수도 있는 만큼 선제적 자금 대응으로 숨통을 열어둔 셈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회사채로 자금이 몰리면서 흥행한 것일 뿐 정유업계에 대한 리스크는 여전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혁재 DB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발행금리를 보면 희망밴드의 상단에서 결정되는 모습을 보였다"며 "기업 펀더멘탈이 좋았다면 금리가 더 낮아졌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펀더멘탈 수준에서 100% 만족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또한 어닝쇼크에 대한 우려 역시 남아있는 만큼 신용등급 강등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신평업계 관계자는 "현 유가 수준이 반년 정도 이어진다면 정유사들의 신용등급 강등은 현실화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