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이노베이션이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공격적 수주, 적극적 투자 등 과감한 행보의 결과로 풀이된다. 국내 배터리 3사 중 후발주자로 여겨지는 만큼 빠른 기술력 제고를 통해 소재 부문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가 주력 사업인 정유-석유화학에 이어 또 다른 캐시카우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17일 배터리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이 올 들어 5월까지 전 세계 76개국에서 판매된 전기차에 탑재한 배터리 에너지 총량은 모두 1.3GWh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9.6% 증가했다. 시장점유율은 같은 기간 2.0%에서 4.1%로 두 배 뛰었다.
이전에는 출고량 기준 전 세계 20위권에도 들지 못하다가 2년 전인 2018년 16위를 기록(점유율 0.8%)한 것을 시작으로 2019년 10위(1.9%), 올해 7위로 10위권 안으로 진입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중국 전기차 시장이 꺾이면서 중국 배터리 제조사의 성장이 주춤한 사이 국내 3사의 성장세가 두드러지고는 있지만, LG화학과 삼성SDI 등에 비해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시작한 지 3년 이상 뒤진 후발주자라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삼성SDI를 바짝 추격하면서 국내 2위 자리까지 넘보고 있다.
이 같은 급격한 성장에는 공격적 수주전략과 빠른 기술력 제고 그리고 적극적인 투자 덕분이라는 평이다.
포트, 페라리, 다임러 등과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었으며 지난해 말 독일 폭스바겐으로부터 따낸 미국 현지 배터리 공급 계약이 공격적 수주전략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당초 미국 현지에 배터리 생산기지가 있는 LG화학이 유력 후보로 꼽혔지만, SK이노베이션의 납품 단가 인하, 현지 배터리 공장 건설 제안 등이 폭스바겐의 구미를 당겼다는 후문이다. LG화학과의 소송전 등 갈등이 촉발된 결정적 계기로도 꼽힌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에도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으며 2021년 양산 예정인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 1차 배터리 공급사로도 선정됐다. 10조원에 달하는 5년치 공급물량을 따냈다.
현대차는 E-GMP를 기반으로 준중형 크로스오버차량(CUV)인 NE와 중형 세단인 프로페시, 럭셔리 브랜드인 제네시스 등 전기차를 생산할 계획이다. E-GMP에 탑재될 제품은 급속충전이 가능한 고성능 리튬이온 배터리다. 배터리 성능을 좌우하는 에너지 밀도를 높여 충전 속도를 빠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리튬이온 배터리 음극재인 흑연이나 실리콘을 리튬메탈로 대체해 에너지 밀도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는 리튬메탈 배터리를 개발 중이다. 밀도가 높아져 주행거리가 늘고 차량 경량화에 따른 에너지 절감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 중국 전기차 시장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중국 베이징자동차는 프리미엄 브랜드 '아크폭스(ARCFOX)'를 런칭하고 9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마크5'를 출시한다. 여기에는 SK이노베이션과 베이징차그룹의 합작사 '베스트'가 생산하는 배터리가 탑재된다. 한 번 충전에 최대 450~500㎞를 달릴 수 있는 3세대용 배터리다.
업계 한 관계자는 "알파T가 중국산이면서도 연속 주행거리 653㎞라는 스펙을 갖춘 만큼 현지 선호도가 높을 것"이라며 "중국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의 대항마가 될 수 있을 전망"이라고 판단했다.
중국 정부가 전기차를 비롯한 친환경차 보조금을 2022년까지 연장하기로 한 점도 호재다. 베이징차와 합작법인을 세우고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하는 만큼 중국 정부의 보조금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크5 가격이 보조금으로 약 10% 할인 효과가 생길 것으로 보인다.
-
과감히 규모를 늘려왔던 배터리 공장 증설 투자 기조를 올해도 이어가고 있다. 배터리 3사 중 유일하게 1분기 적자전환되며 수익성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지만, 시장 흐름에 맞게 추가 투자도 진행하겠다는 방침이다.
지난해 말 중국 창저우 공장과 헝가리 코마롬 제1공장을 준공하면서 생산능력을 종전 4.7GWh에서 19.7GWh로 키웠다. 이들 공장의 생산능력은 각 7.5GWh에 이른다. 7.5GWh는 전기차 15만대 이상에 공급할 수 있는 수준이다.
국내외 배터리 생산기지의 생산규모를 현 수준에서 2023년 71GWh, 2025년 100GWh 이상으로 확대해 글로벌 톱3 전기차 배터리 회사로 도약한다는 목표다. 연내 준공을 앞둔 중국 옌청 공장은 20GWh 규모이며 코마롬에서도 2022년 9.8GWh 규모의 제2공장을 준공할 계획이다.
미국 조지아주에서는 총 3조원을 투입해 2021년 제1공장, 2023년 제2공장 등을 준공, 미국에서만 연 21.5GWh의 생산능력을 갖추겠다는 계획이다. 주요 전기차 시장인 중국과 유럽, 미국까지 모두 공장을 두며 삼각편대를 구축하는 셈이다.
연구개발비·전문인력 확보 등을 포함하면 2012년 MWh 규모의 서산공장을 준공해 배터리 양산에 나선지 8년여 만에 10조원가량을 투자한 것으로 추정된다.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은 지난 4월 미국 2공장 출자 결의 후 "어려울 때일수록 미래 성장동력에 과감한 투자를 진행하는 게 사업의 본원적 경쟁력을 확보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정공법"이라며 "이번 투자로 배터리 사업이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전기차 산업의 가치사슬과 생태계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기술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사업보고서 분석 결과 R&D 투자 확대 기조가 뚜렷하다. 2015년 매출액 1701억원 대비 0.35%이던 R&D 비중은 지난해 0.46%까지 확대됐다. 1000억원대에 머물던 R&D비용은 2017년 이후 2000억원대로 높아졌다. 최근 이어진 정제마진 악화 및 제품 스프레드 하락 등으로 영업성적이 부진한 가운데에서도 R&D 비중을 확대한 것이다.
이를 통해 양극재를 구성하는 금속인 니켈-코발트-망간 비율을 각각 60%-20%-20%로 배합한 NCM622 양극재를 적용한 배터리를 2012년 세계 최초로 개발했고, 2014년 양산에 성공했다.
양극재는 배터리의 힘과 주행거리에 핵심 역할을 하는 4대 핵심소재 가운데 하나다. 니켈 함량을 높이면 출력은 좋아지지만, 이와 동시에 안정성이 떨어져 이를 문제없이 구현하는 것기 관건이다.나아가 이보다 진화한 NCM811 양극재를 적용한 배터리도 2016년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2018년부터 양산 중이다. 지난해에는 배터리 에너지 밀도와 효율을 높인 NCM구반반(90%-5%-5%)을 채택한 배터리 개발도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SK이노베이션 측은 "R&D 비용 중 상당 부분이 배터리와 소재 부문의 경쟁력 확대를 위해 투입되고 있다"며 "R&D를 통해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고 기존 R&D활동을 고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터리 소재 사업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자회사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는 음극재, 양극재, 전해질과 함께 배터리 4대 핵심소재로 꼽히는 리튬이온 배터리 분리막(LiBS)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SKIET는 2004년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세 번째로 LiBS 생산기술을 독자 개발했다. 2007년에는 축차 연신 공정을 완성했고, 지난해에는 충북 증평 공장을 증설하며 분리막 생산능력을 기존 3억6000만㎡에서 5억3000만㎡로 늘렸다.
SKIET는 전기차 시장의 폭발적 성장에 맞춰 증평과 중국, 폴란드 등 국내외에서 생산시설을 늘리고 있다. 현재 건설 중인 글로벌 생산거점이 모두 완공되는 내년 하반기에는 생산능력이 12억1000만㎡로 확대된다. 또 상장(IPO)을 추진해 추가적인 투자 재원도 마련할 방침이다.
SKC는 SK넥실리스(옛 KCFT) 인수를 통해 2차 전지 핵심 소재인 동박 생산 부문에서 글로벌 1위로 올라서기도 했다. 또 SK루브리컨츠는 전기차 배터리에 최적화된 윤활유 생산에 나서는 등 SK그룹 주요 계열사가 모빌리티 시장 공략을 위한 'SK인사이드'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가 이러한 추세로 성장을 이어간다면 기존 주력사업인 정유, 화학·소재 등 비정유사업과 더불어 캐시카우 삼각편대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며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 구축이 기대된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