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재건 '꿈틀'…HMM 알헤시라스호 등 2만4천TEU급 '컨'선이 마중물 역할20% 이상 실적 감소 급유선업계도 활력… 200ℓ 드럼통 3만6천여개 분량 급유대형 급유선 없어 모두 '절레절레'… 협회·GS칼텍스, 수송선→급유선 임기응변17시간 걸쳐 7천3백t 급유 성공… "2천6백t급 중형 급유선 2척 이상 확보해야""자발적 서비스 혁신만이 살길… 현장에서 작은 것부터 바꿔나가야 경쟁력 ↑"
  • ▲ 지난달 27일 첫 항해 마치고 부산 신항 입항하는 알헤시라스호.ⓒ연합뉴스
    ▲ 지난달 27일 첫 항해 마치고 부산 신항 입항하는 알헤시라스호.ⓒ연합뉴스

    한진해운 파산 이후 쇠락의 길을 걷던 국내 해운항만업계에 해운 재건의 물결이 일고 있다. 그 출발선엔 '선왕'이란 별칭을 얻은 HMM(옛 현대상선)의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박 알헤시라스호가 있다. HMM은 정부의 해운 재건 5개년 계획에 따라 다음달까지 2만4000TEU(1TEU는 6m 컨테이너 1개)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12척을 넘겨받는다. 알헤시라스호를 시작으로 이미 오슬로호·코펜하겐호·더블린호·그단스크호·호테르담호 등이 '만선 행진'을 이어가며 유럽 노선에 투입된 상태다.

  • ▲ 문현재 사단법인 한국급유선선주협회 회장.ⓒ뉴데일리DB
    ▲ 문현재 사단법인 한국급유선선주협회 회장.ⓒ뉴데일리DB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고 했다. 해운재건의 물결을 타고 해운항만 연관산업이 재도약하려면 변화의 흐름에 발빠르게 대응해야 한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서비스를 개선해야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지난 2일 부산시 중구의 사단법인 한국급유선선주협회(이하 급유선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문현재 회장은 얼마전 있었던 알헤시라스호의 무사 귀항에 고무돼 있었다. 문 회장은 알헤시라스호 같은 초대형 선박의 운항이 침체한 국내 선박급유업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지난 4월30일 부산항을 출발한뒤 5월8일 중국 선전 옌텐(鹽田)항에서 1만9621TEU를 가득 싣고 유럽으로 떠났던 알헤시라스호는 출항 90여일 만인 지난달 27일 처녀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부산항에 돌아왔다.

    알헤시라스호는 길이 400m, 폭 61m, 높이 33.2m로 현존하는 컨테이너선 중 가장 크다. 면적으로 치면 축구장 4배 크기와 맞먹는다. 종전 최대 '컨'선인 스위스 MSC사의 'MIA호'(2만3756TEU)보다 208TEU를 더 실을 수 있다.

    알헤시라스호는 연료탱크도 매머드급이다. 급유선협회 설명으로는 알헤시라스호에 연료를 가득 채우는 데만 17시간30분이 걸린다. 급유량은 7300t(7300만ℓ)에 달한다. 200ℓ들이 드럼통으로 환산하면 3만6500개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7300t은 알헤시라스호가 100일 동안 운항할 수 있는 양이다. 컨테이너선이 아시아~유럽 항로를 오가는 데 보통 90일쯤이 걸리므로 한 번 급유로 유럽까지 왕복할 수 있는 셈이다.

    HMM은 그동안 싱가포르나 로테르담에서 연료유를 공급받다가 알헤시라스호 취항을 계기로 국내업체인 GS칼텍스와 급유 계약(1년간)을 맺었다. 황산화물(SOx) 저감장치인 스크러버를 장착한 알헤시라스호는 고유황유를 연료로 쓸 수 있다. 현재 국내에선 GS칼텍스만 유일하게 고유황유 공급이 가능하다.

  • ▲ 급유받는 알헤시라스호.ⓒ연합뉴스
    ▲ 급유받는 알헤시라스호.ⓒ연합뉴스

    그러나 알헤시라스호와 같은 초대형 선박에 연료유를 공급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문제였다. 마땅한 급유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선 철광석 운반선 등에 3000~4000ℓ쯤의 연료유를 공급한 적은 있었지만, 높이 30m가 넘는 초대형 선박에 7000t 이상을 급유한 사례는 전무했다. 더욱이 급유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배가 정박하는 20시간 안에 급유를 끝마쳐야 출항 일정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는다.

    문 회장은 "GS칼텍스에서 침체한 국내 급유선업계에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줬다. 너무 고마워 나중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서 보냈다"면서 "하지만 당시는 마땅한 급유설비를 갖춘 배가 없던 터라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마음이 조급하던 때"라고 설명했다. 당시 국내에는 699t급 급유선만 있었다. 699t 급유선에는 최대 1600t의 기름을 실을 수 있다. 알헤시라스호에 연료를 가득 채우려면 699t급 급유선 4.5개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문 회장은 "(대형 급유선이 없어) 모두가 안 된다고 했다. 해운 선진국으로서 수치라 생각했다"면서 "중간 대리점에 급유계획서를 내보라 했더니 5~6척을 붙여 릴레이로 급유하는 방식이 고작이었다"고 말했다. 문 회장은 "해상 급유 작업은 녹록지 않다"면서 "배를 붙이려다 부딪칠 위험이 있어 급유를 받는 모선은 급유선 수를 최소화해달라고 요구한다. 또 30m 이상 높이로 기름을 쏘아 올려야 하는데 고압에 6인치 호스라도 터지면 기름유출 사고로 이어진다"고 부연했다. 무엇보다 699t급 급유선 5~6척을 붙여 작업한다면 주어진 20시간 안에 급유를 마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본선에 호스를 연결하고 교체하는 준비작업에만 족히 몇 시간이 낭비될 게 불 보듯 뻔했다.

    문 회장은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면 알헤시라스호는 부산항에서 최소한의 기름만 싣고 출항해 싱가포르나 로테르담에서 급유를 받을 터였다"며 "싱가포르나 로테르담에는 길이 100m 폭 30~40m의 바지선에 급유호스가 크레인에 고정된 5000t급 급유선이 있다. 이 배에는 1만t 이상 연료를 실을 수 있어 알헤시라스호도 한 번에 급유할 수 있다. 말 그대로 '해상 주유소'"라고 설명했다. 모선에 호스를 연결할 필요 없이 크레인을 돌려 방향만 맞추면 되므로 전체 급유 시간도 대폭 줄어든다.

    문 회장은 "GS칼텍스와 궁리 끝에 정유공장과 저유소를 오가는 2600t급 수송선(액화화물 운반선)을 급유선으로 활용하기로 했다"면서 "법률적 근거가 없어 못 하겠다는 선주를 '시장을 살려야 한다'며 어렵게 설득했다. 급전까지 구해주고 밤샘작업을 벌여 급유선에 필요한 각종 안전장치를 설치한 뒤에야 급유선 면허등록을 낼 수 있었다"고 부연했다. 급유선협회는 그렇게 급조한 2600t급 1척과 699t급 2척 등 3척의 급유선을 동원해 17시간30분 동안 시간당 400㎏의 연료유를 펌프질한 끝에 알헤시라스호 연료탱크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 ▲ 문 회장이 선원 작업복에 붙일 야광조끼를 들어 보이며 안전사고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뉴데일리DB
    ▲ 문 회장이 선원 작업복에 붙일 야광조끼를 들어 보이며 안전사고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뉴데일리DB

    문 회장은 "국내 급유선업계에 초대형 선박 출현은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로, 최고의 고객"이라며 "중국발 코로나19(우한 폐렴)로 급유 건수는 예년보다 20% 이상 줄었는데도 전체 급유량은 증가한 게 연료를 공급받는 모선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급유선 1척에 보통 7~10명이 일한다"면서 "HMM의 초대형 '컨'선이 추가로 인도되고 국내 정유사가 앞으로도 연료유 공급계약을 계속 따낸다면 수많은 일자리가 생겨나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문 회장은 해운 재건의 물결이 해운항만산업 전반으로 확산하려면 업계 스스로 서비스를 혁신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문 회장은 단적인 예로 급유량 측정을 들었다. 그는 싱가포르나 로테르담에선 급유량을 주유 미터기로 자동 측정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초대형 선박인 알헤시라스호조차도 선원이 줄자로 재는 현실이 우리 서비스의 현주소라고 아쉬워했다.

    문 회장은 변화는 현장에서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문 회장은 "모르는 사람은 협회장이 무엇 하러 급유 현장에까지 찾아가느냐고 하는데, 현장에 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면서 "90% 이상의 사고는 인적 과실로 발생한다. 본선에 연결하는 호스를 중간에 여러 곳 묶게 하는 것이나 야간작업 때 눈에 잘 띄게 급유선을 흰색으로 칠하고 깨끗하게 유지하자는 것, 장시간 기름을 넣는 동안 모선의 선원이 쉴 수 있게 휴게소를 짓는 것 등 현장의 작은 것부터 바뀌어야 경쟁력이 높아진다"고 밝혔다. 급유선협회가 이번에 야간작업자 안전 확보를 위해 야광조끼를 붙인 작업복 1000벌을 제작하고, 10t 이상 선박에 제세동기를 사서 나눠주는 것도 사고 예방이 곧 서비스 경쟁력을 높이는 첨병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 ▲ 호스 연결해 급유받는 알헤시라스호.ⓒ뉴데일리DB
    ▲ 호스 연결해 급유받는 알헤시라스호.ⓒ뉴데일리DB

    문 회장은 싱가포르나 로테르담 등과 경쟁하기 위해선 정부의 투자 지원도 합리적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는 태도다. 문 회장은 "정부가 소형(급유)선 현대화사업을 벌이는 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급유선 10척 중 8척이 299t 미만의 소형선이다. 급유받는 본선이 대형화하는 추세여서 작은 배는 안 쓰는 추세다. (정부 지원이) 현장 상황과 거꾸로 가는 셈"이라며 "선박 현대화사업도 수요가 있는 '똘똘한 한 척'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 회장의 이런 의견은 회원사 200곳 중 90%가 1척의 급유선만 보유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회원들이 반색할 리 만무한 내용이다.

    그러나 문 회장은 "5년 전부터 효율성을 높이려면 지금의 작은 급유선으론 안 된다는 주장을 펴왔다. 앞으로 사업을 안정적으로 영위하려면 시장의 파이를 키워야 한다"며 "싱가포르 급유선 시장은 우리의 10배 이상 크다. 글로벌 경쟁을 위해선 본선의 대형화에 맞게 (급유선 몸집도) 키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문 회장은 소형선에 투입할 현대화사업 자금을 중형 급유선 신조에 투입해야 한다는 견해다. 그는 "이제야 싱가포르처럼 대형 급유선으로 해상 주유소를 구축하는 것은 늦었다. 지금은 한 번에 4000~5000t의 연료를 공급할 수 있는 2600t급(중형) 급유선을 2척 이상 확보하는 게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문 회장은 "선령(배 나이)이 오래돼 폐선을 앞둔 경우 중형 급유선으로 신조할 수 있게 투자자를 설득하고 있지만, 개인이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소형선 현대화사업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문 회장은 현재 한국해운조합이 주도하는 급유선 현대화사업을 급유선협회가 맡을 수 있도록 협회 운영의 투명성을 제고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문 회장은 "아무래도 (급유선 현대화사업을) 급유선협회에서 맡는 게 사업의 효율성 측면에서 바람직하다"면서 "정부가 믿고 맡길 수 있게 협회를 투명하게 운영해 항만 연관산업 발전을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

  • ▲ 문현재 사단법인 한국급유선선주협회 회장.ⓒ뉴데일리DB
    ▲ 문현재 사단법인 한국급유선선주협회 회장.ⓒ뉴데일리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