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닥터둠 자청…하락장 예측 혜안으로 화제매크로·종목 분석하며 애널리스트급 PB 역할 톡톡"품위 있는 주식 투자 이끌 셰르파 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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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현 기자
    지지부진한 약세장, 동학개미 서학개미 할 것 없이 곡소리가 나는 요즘 주식쟁이들 사이에서 유독 화제가 되는 인물이 있다. 강영현 유진투자증권 부장이다. 강 부장은 여의도 '닥터둠'(1987년 뉴욕 증시 대폭락·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예견한 미 투자전략가 마크 파버의 별칭) 역할을 자청할 만큼 올 들어 줄곧 주식시장의 위기를 경고해왔다.

    연초부터 내림세를 걷던 코스피가 바닥을 다지며 반등할 것이란 희망 섞인 기대감이 시장에 퍼져있을 당시에도 강 부장은 하락을 점쳤다. 지수는 2500대까지 내려왔고 그의 고객들은 미리 이를 대비한 인버스 투자로 300%, 400% 가까운 수익을 봤다. 5월 중순 지수가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기 직전 좋은 타이밍에 포트폴리오를 정리했고, 강 부장은 최근의 상승을 단기 반등으로 보고 위기를 앞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 친근한 말투 안에 담긴 혜안은 개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잔치는 이제 끝났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비중을 약간 조절하는 수준이 아닌 더 큰 하락장에 대비해야 할 시점이라는 게 강 부장의 견해다. '연준이 어떻다, 정부 정책이 어떻다' 하며 희망회로를 돌리려는 투자자들에게 그는 단호히 말한다. 

    강 PB의 최근 하락 뷰는 철저히 데이터를 근거로 한다. 그는 성균관대 경제학 학사·석사 과정을 거쳤고, 대학원 시절 미국 버지니아공과대에서 계량경제학을 맛봤다. 박사 과정을 앞두고 증권맨과 경제학자의 길 앞에서 고민했다. 주식을 하기 위해 증권사 입사를 택했지만 증권맨이 되고서도 매크로를 이해하고 예측하는 데엔 여전히 학자처럼 공부하고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강 부장의 태블릿 PC에는 직접 매크로 상황을 실시간 분석해 업데이트한 400페이지 분량의 자료가 정리돼 있다. 요즘도 그는 하루 7시간 이상을 매크로 지표와 개별 기업 분석 공부에 할애, 자료를 업데이트한다. 애널리스트와 PB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고객들에게 셰르파(히말라야 등반가들의 짐꾼 겸 안내인)임을 분명히 한다. 전반적인 준비 상황은 물론 등정 루트 선정에서부터 정상 공격시간의 최종 설정에까지 모든 것을 조언하는 머슴이자 동행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산행이 될 수 있기에 지표와 종목 분석, 관찰과 치밀한 전략을 제시하는 것은 투자자를 안내하는 PB로서 제1 원칙이다. 

    ◆초심자 행운 뒤 찾아온 실패

    강 부장이 근거에 기반한 리스크 관리를 과하리만큼 중시하는 건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1999년 닷컴버블에 한 번,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에 한 번, 그는 그야말로 깡통을 찼다. 

    첫번째 실패는 초심자의 행운 뒤 찾아왔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로 한국 증시가 요동치던 1998년, 충남 보령 농부의 아들인 그는 대학 2학년생이었다. 우연히 세미나를 통해 고액 연봉의 여의도 증권 전문가 강의를 듣게 됐고, 돈을 벌어 부모님을 돕고 싶다는 생각에 주식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아버지가 시골에서 농사 짓고 난 수확물을 어머니가 장터에 나가 노점 판매하셨거든요. 막연히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을 돕고 싶은 꿈 많은 늦둥이였죠. 수레바퀴 이후 최고의 발명품,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 성공한 증권맨을 보면서 '바로 이거다' 했어요(웃음)."

    매일 경제신문을 펼쳐놓고 들여다봤지만 경제학도로서 경영, 회계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답답함에 무작정 찾았던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증권시장론, 화폐금융론 등 2학년 수준에 맞는 전공서적을 강 부장에게 추천해줬다. 주식의 매력에 흠뻑 빠져 지식을 탐닉하는 그 과정이 말할 수 없이 재밌었다고 한다. 본인의 전공수업도 뒤로 하고 경영학 수업 청강생으로 들어가 시험까지 봤다. 대학 시절 그는 주식에 미친 '괴짜' 학생이었다.

    동시에 실전에 나섰다. 아르바이트 시급이 1500원이던 무렵, 부모님을 설득해 등록금 300만원을 시드머니로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지난해까지 맛봤던 유동성 장세였기에 계좌는 일주일 만에 500만원으로 불어났고 두 달 만에 3배까지 수익이 났다. 

    행복도 잠시, 닷컴버블이 터지면서 주식이 급락했다. 그간의 행운이 실력이라 믿었기에 미수까지 끌어썼고 깡통계좌가 되는데 겨우 3일이 걸렸다. 대학생도 쉽게 신용카드를 발급해주던 시절, 현금서비스까지 받아다가 쓸 만큼 무모했다. 당시 '역시 배운 놈은 다르다'며 좋아하던 아버지의 입에서 불과 4개월 만에 '앞으로 주식하는 놈은 자식이 아니다'는 말이 나왔으니 그 충격은 짐작할 만하다.

    주식에 질려버릴 법도 한데,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주머니 사정이 녹록치 않아 서울 혜화동에서 종로서점까지 매일같이 걸어가 읽고 싶던 주식 책을 몇시간이고 읽다 왔다. 영어강사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빚을 갚고, 투자 관련 강의를 듣는데 썼다. 대학원 시절 해군장교로 느지막하게 간 군대에서도 주식책을 쌓아놓고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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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 입성…애널리스트와 PB 사이, 그 어딘가

    대학원을 마친 그는 31살, 늦깎이로 유진투자증권에 입사했다. 당시 조카와 입사 동기였으니 남들보다 시작이 너댓살 늦었다. 처음 경기도 분당 지점에 발령을 받았을 때 현실은 혹독했다. 

    폼나는 증권맨으로 일하고 싶었는데 제 발로 찾아온 고객 2명, 지정받은 고객까지 11명의 예탁자산 4억원이 전부였다. 전단지를 만들어 근처 모란시장을 찾아 고객 모집에 나섰지만 아무리 해도 성과가 없었다. 당시 모란시장엔 처지가 어려운 상인이 많았다는 걸 나중에 선배들이 귀띔해주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증권맨으로서 승부를 내야겠단 생각에 서울 여의도 발령을 회사에 요청했다. 유난스럽단 눈총도 받았지만 박사 유학 과정까지 포기하고 입사한 증권사에서 안주하고 싶진 않았다고 한다. 

    호기롭게 여의도 둥지를 틀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터졌고, 지수는 바닥을 쳤다. 모든 주식 계좌가 그야말로 너덜너덜해진 시기였다. 내 돈만 잃었던 1998년과 달리 고객과 친한 지인들의 자산까지 타격을 입혔다는 생각에 손발이 잘려나가듯 괴로웠다. 어떻게든 계좌를 살려내야했기에 두 번째 찾아온 실패는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여의도에서 그는 일과 시간엔 기업 탐방과 고객 영업을, 이후엔 매크로 공부를 하느라 밤 10시 이전에 퇴근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오후 3시30분까지 장 상황에 대한 대응을 하고, 이후부턴 종목 발굴을 위해 매일 기업 탐방에 나섰다. 누가 탐방을 나간다고 하면 대리운전이라도 하며 한 자리 끼어 귓동냥했다. 그러면서 기업을 고르는 안목도 길렀다. 날마다 강행군을 했으니 성과도 상당했다.

    "재무제표가 괜찮아 보이는 기업의 웨이퍼 제조공장을 직접 찾아갔어요. 완성품을 좀 볼 수 있겠냐 물었더니 반쪽이 깨진 걸 가져왔더라고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무시해서 저러나 했는데 알고보니 전량 유럽으로 수출돼 샘플로 내놓을 제품 하나 없을 정도로 잘되고 있는 상황이었던거죠(웃음). 마진은 17%, '바로 이 회사다' 했습니다. 6000원짜리 주식이 그 뒤로 6개월 만에 3만2000원대로 치솟았죠."

    회사에선 그의 요청에 따라 PB의 역할과 탐방 및 매크로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애널리스트 역할이 동시에 가능한 부서인 투자정보연구팀을 꾸려줬다. 그의 독특한 역할이 만들어낸 성과에 회사 앞에서 강 부장을 기다리는 헤드헌터들도 수두룩했다.

    ◆개미들의 셰르파…"품위 있는 주식 투자로 안내"

    강 PB가 입소문을 타게 된 배경엔 모바일 플랫폼을 적극 활용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이야 삼프로TV 등 각종 투자정보 채널은 물론 각 증권사들의 MTS 내 각종 투자정보 콘텐츠가 활발히 제공되고 있지만 10년 전만 해도 그렇지가 못했다.

    처음 투자정보팀을 만들었을 당시 그는 팀원들과 발품 팔고 다양한 분석을 통해 만들어낸 정보엔 자신이 있었지만 찾아오는 고객이 없어 애를 먹었다. 고심 끝에 투자정보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외부 어플리케이션 '주식깔때기'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앱과 유튜브 채널을 통해 투자 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유진투자증권 관리 계좌를 확보했다. 이를 통해 유진투자증권으로 유입된 고객은 현재 700여명에 이른다.

    처음엔 고객 유입을 위한 전략이긴 했지만 현재는 그가 더 좋은 정보를 분석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장치가 되고 있다. 강 부장은 오프라인 거래는 하지 않는 대신 온라인을 통해 투자 정보를 자문하고 안내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 영업점 매매에 기대 투자하던 과거와 달리 시대가 변했고, 급속도로 유입된 엄지족 투자자들은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판단에서다.

    비싼 오프라인 매매수수료를 자진해 포기하면서 그가 받는 월급도 이전의 10분의 1로 줄어들었지만 PB로서 주식 투자가 이전보다 훨씬 더 재밌어졌다고 한다. 하루 7시간 이상을 투자 정보 분석에 할애할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

    "여러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지만 증권사 PB는 오로지 나의 고객만을 위한 가장 좋은 투자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투자자와 기관 사이에 존재하는 정보 비대칭성을 해소해주고, 고객이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시장을 정확히 안내해주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PB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고객이 품위(dignity) 있게 주식 투자할 수 있도록 돕는 셰르파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