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인재 싹쓸이 우려 기존 반도체·배터리 계약학과도 이탈 조짐"대안이 없다"… 우수 인력 확보 초비상
  • ▲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클린룸 전경 ⓒ삼성전자
    ▲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클린룸 전경 ⓒ삼성전자
    정부가 내년부터 의과대학 모집정원을 대폭 늘리기로 결정하면서 반도체와 배터리 등 IT 산업계가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공계 우수 인력이 의대로 쏠리는 현상이 더 심각해지는데 더해 이미 업계 인재들이 의대 준비로 돌아서려는 움직임까지 보여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대학과 기업이 공을 들였던 반도체, 배터리 계약학과도 타격이 예상된다.

    7일 반도체·배터리업계에 따르면 전날 정부가 의대 모집정원을 내년부터 2000명 증원키로 하며 이공계 인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반도체, 배터리 산업 전반이 직격탄을 맞을 것이란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우선 가뜩이나 의대로 몰렸던 이공계 우수 인력이 이번 증원을 계기로 산업계에선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교육계 분석에 따르면 의대 정원이 한 해 2000명 가량 늘어나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이른바 SKY 합격생의 80% 가량이 의대 합격권에 해당된다. 여기에 대학 재학 중 의대 진학을 목표로 재수나 반수에 도전하는 학생들까지 의대로 쏠리면서 이공계에선 사실상 상위권이 사라지는 현상까지 가능할 것으로 본다.

    무엇보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해버린 건 전국 주요 대학에 있는 반도체, 배터리 계약학과 학생들이다. 정부와 반도체, 배터리 기업들은 지난 2010년 경부터 인재 확보와 고급 인력 양성을 위해 주요 10개 대학 공대와 협력해 계약학과를 신설해 운영하고 있다. 성균관대와 울산과학기술원, 한국과학기술원 등은 반도체 특성화대학원으로 지정돼 공정 전 분야에 걸쳐 인재 양성을 시작했다.

    최근엔 글로벌 반도체, 배터리 시장이 커지고 국가 미래 핵심 산업으로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계약학과와 특성화 대학원을 점차 확대하는 추세였다. 지난달에만해도 산업통상자원부는 국내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을 위해 반도체 계약학과와 특성화 대학을 기존 10개교에서 18개교로 늘리겠다는 계획인데, 의대 정원이 확정되면서 찬물을 끼얹은 분위기라고 알려졌다.

    반도체, 배터리 계약학과 학생들도 의대 정원 확대에 기대를 걸고 다시 수험생활에 돌입하기 위해 이탈하는 사례가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계약학과에서 각종 장학금이나 산학협력 실무, 인턴 등의 취업 기회 등을 제공하고 향후 국내 주요 반도체, 배터리 기업에 취업을 보장하는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의대 진학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학생들도 다수 나타날 수 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이미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도 의대 증원으로 술렁이고 있다. 직장인 익명 게시판 블라인드 등에는 전날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이후 자신의 출신 대학, 경력, 과거 수능 선택과목 등을 언급하며 의대 지원이 가능할지 여부를 묻는 글들이 여러건 올라왔다.

    삼성과 SK, LG 등 업계 최고 대우를 받는 대기업 종사자들이 대부분이고 5년 이상 업력을 쌓은 사람들도 있지만 의대 진학은 놓칠 수 없는 기회로 여기는 분위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최근 몇 년간 반도체 분야는 업황 악화로 성과급 등이 줄어 처우는 나빠졌는데 업턴에 대비해 비상 체제에 들어가면서 업무 강도는 더 높아졌다는 평이 나오면서 이번 기회에 이른바 '탈(脫)반도체' 하자는 의견이 많다.

    올해 본격적인 업황 회복을 앞둔 반도체, 배터리 기업들의 고심도 깊어졌다. 인재 확보는 이미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닌데다 직원들이 처우와 복지 수준에 대한 눈높이를 지속적으로 높이고 있어 부담이 크다. 무노조 경영을 이어오던 삼성 마저 최근 몇 년 사이 높아진 직원들의 목소리에 통합 노조까지 결성되며 인재 확보는 물론이고 유지 및 관리까지 인사 분야에서 신경써야 할 일들이 늘었다.

    기업들이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부담이 커지는 가운데 의대 증원으로 이탈자가 속출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올해 반도체, 배터리업계 인재 전쟁은 더 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업황이나 기업 실적 개선이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에서 인재확보에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처지"라며 "의대 증원으로 계약학과 제도에도 손질이 불가피해보인다"고 말했다.

    단순히 계약학과나 특성화 대학만 늘릴게 아니라 양질의 교육을 제공해 인재 확보 문제의 근본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매년 필요한 반도체 인력은 1만 5000명 수준인데 여기서 의대 등으로 빠져나가는 인력은 크지 않다"며 "의대에 인재를 뺏기는 문제를 신경쓰기 보단 반도체 인재를 제대로 양성할 수 있는 실력있는 교수진을 확보하고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