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를 피했더니 호랑이가 나타났다'. 지금의 금융권 CEO 선임 과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 말 만큼 적절한 표현이 또 있을까.
한 때 금융권에 관료 출신 인사 선임이 많았던 적이 있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관료'와 '마피아'의 합성어인 '관피아'란 신조어가 널리 쓰일 정도였다.
관피아 출신 CEO들은 정부 정책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정부와의 인적 네트워크가 잘 돼 있다는 장점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낙하산 인사'라는 꼬리표는 항상 이들을 따라다녔고, '내부 출신 인사들의 사기를 꺾는다', '정부가 금융사를 쥐락펴락하려 한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 관피아 인사들은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자리를 이번엔 '보이지 않는 손'이 채웠다. 우리은행 행장 인사만 봐도 이광구 내정자는 당초 거론조차 되지 않던 인물이다. 그런데 갑자기 유력 후보로 떠오르더니, 현직인 이순우 행장이 돌연 연임 포기를 선언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누구도 알 방법이 없다. 행장후보추천위원회의 모든 회의는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은 행추위원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은행연합회장 선출 과정은 더욱 알쏭달쏭하다. 하영구 전 씨티은행장이 차기 회장에 낙점됐다는 소문이 금융권을 휩쓸었지만, 정작 시중은행장들은 금시초문이란 반응이었다. 은행의 이익, 은행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은행장들이 뽑는 자리가 바로 은행연합회장이다. 그런데 은행장들조차 모르는 사이에 차기 연합회장이 내정됐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그리고 그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황당한 경우다.
이광구 내정자는 분명 우리은행 내부 출신이다. 하영구 회장 역시 관료 출신 인사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선출과정을 지켜본 금융권의 반응은 '관피아보다 더한 인사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 '탈(脫) 관피아' 바람을 불러오고도 정부당국이 비난받는 이유는 이쯤 되면 명확해진다.
수 많은 언론들과 여러 금융권 전문가들은 "한국 금융이 20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초등학교 반장도 이런 식으로 선출되지는 않는다"고 비난한다. 기자도 이런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기자가 걱정하는 또 한 가지는, 이대로 가다가는 금융산업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각 금융사 경영진들이 진취적으로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나서기보다는, 정치권 줄 대기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인 타기'를 잘 한 결과가 신규 사업을 잘 수행한 것 보다 큰 보상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신규 사업에 실패할 경우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온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뻔하다. 결국 금융산업은 이대로 주저앉고 말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7일 "찌라시 때문에 나라 전체가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발언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밀실 선임'이 계속된다면, 금융권은 찌라시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라도 경영승계시스템을 확고히 정착시켜, 차기 CEO 선임시 논란이 일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물론 이를 위해선, '높으신 분'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시스템이 구축돼도 '밀실 인사' 앞에선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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