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경영’ 삼성의 호암, ‘도전경영’ 현대의 아산...나의 롤모델은?
  • ▲ 아산 정주영 고 현대그룹 회장과 호암 이병철 고 삼성그룹 회장ⓒ
    ▲ 아산 정주영 고 현대그룹 회장과 호암 이병철 고 삼성그룹 회장ⓒ

    ‘시스템경영 이병철’이냐, 아니면 ‘도전경영 정주영’이냐.

     

    오늘날 대한민국 경제의 토대를 닦은 영웅들 가운데 대표적인 거인(巨人)을 꼽으라면 대부분 국민, 학자들이 주저없이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를 선택할 것이다.  

     

    올해 탄생 100년을 맞은 아산 정주영 고 현대그룹 회장(1915-2001)과 호암 이병철 고 삼성그룹 회장(1910-1987)은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 세계경제 최하위권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도록 기업을 일군 세기의 영웅들이었다.
       
    세계적인 경영학자들로부터 ‘압축 성장 기업인의 모델’로 칭송받는 두 창업주의 경영 정신은 유사했지만 경영스타일은 판이하게 달랐다. 정주영 회장이 ‘도전적 경영인’이었다면 이병철 회장은 ‘합리적 경영인’이었다.

     

    하루를 원두커피로 시작한 호암은 끊임없이 인재를 발굴하고 치밀한 사업 분석과 전략을 토대로 기업을 성장시켰다. 무역, 모직사업에 이어 야심차게 진출한 전자, 반도체 사업은 오늘날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축이 됐다.

     

    철두철미한 현장경영을 고집했던 아산은 빠른 직관과 판단력을 토대로 강도 높게 새로운 사업들을 개척해나갔다. 해외 건설을 통해 수십억달러씩의 외화를 벌어들이고 중공업, 자동차 등 한국 중후장대 산업의 기초를 닦았다.       

     

    ‘시스템경영’을 추구했던 이병철 스타일을 롤모델(roll model)로 삼을까, 아니면 ‘도전경영’을 모토로 뛰었던 정주영’ 스타일이 적합할까.

     

    오늘날 대기업 경영자는 물론 야심차게 새로 창업하려는 기업인, CEO를 꿈꾸는 기업 간부 등 누구를 멘토로 삼아야 할 지 고민이 될 수 있다. 두 경영인의 경영스타일을 분석해 자신의 코드에 맞게 경영스타일을 재창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경제 거인의 경영 스타일 가운데 다른 것이 많지만, 공통점은 ‘성공하려면 자기 분야 최고의 프로페셔널(professional·전문가)이 돼라’는 것이다.    

     

    ▶ 이병철 회장을 감동시킨 도쿄의 이발사  

  • ▲ 호암 이병철을 감동시킨 도쿄 모리타이발소의 3대 이발사는 세상을 떠나고, 아들인 4대 이발사(사진)가 운영하고 있다. 사진제공 대구매일. ⓒ
    ▲ 호암 이병철을 감동시킨 도쿄 모리타이발소의 3대 이발사는 세상을 떠나고, 아들인 4대 이발사(사진)가 운영하고 있다. 사진제공 대구매일. ⓒ

    1950년 호암은 경제시찰을 위해 일본에 들렀다. 어느 날 저녁 아카사카의 뒷길을 걷다가 한 이발소를 보고 마침 머리를 손질할 때도 됐다고 생각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허술한 가게 입구에 '모리타'라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가위질을 하고 있는 40세 전후로 보이는 주인에게 별다른 생각 없이 말을 건넸다.
     
    "이발 일은 언제부터 시작했소?"

     

    "제가 3대째니까, 가업이 된 지 이럭저럭 70년쯤 되나 봅니다. 자식 놈이 계속 이어주었으면 합니다만…."

     

    특별한 뜻이 없는 잡담이었지만 예사말로 들리지 않았다. 패전으로 완전히 좌절하고 있어야 할 일본인인데, 담담하게 대를 이은 외길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투철한 직업의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이 이발소는 1878년 개업했고, 이 회장이 찾았던 당시 3대 이발사는 훗날 타계하고, 주인의 희망대로 아들이 4대째 이발소를 경영하고 있다. 137년 동안 가업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 호암은 1954년 제일모직을 창업하면서 용어도 낯선 '품질경영'을 모토로 내걸었다ⓒ
    ▲ 호암은 1954년 제일모직을 창업하면서 용어도 낯선 '품질경영'을 모토로 내걸었다ⓒ

    호암은 모리타 이발소를 계기로 일본 기업들의 저력을 느끼게 됐다. 유심히 살펴보니 도쿄의 과자 제조사인 도라야는 1592년 개업해 300년 이상 과자를 만들고 있었고 1586년 설립된 마쓰이건설회사가 360여년째 경영하는등 수백년 전통의 기업이 즐비했다.  

     

    일본 기업들의 철저한 장인정신을 눈으로 확인한 그는 일본의 '직인(職人) 정신'을 평생의 사업 신념 중 하나로 삼았다. 한 가지 일에 목숨을 걸고 그 분야에서 최고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도쿄에서 돌아온 호암은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품질경영’을 모토로 삼게 됐다.

     

    ▶ 정주영 회장으로 ‘병신같은 놈’ 욕 먹던 그는...  

  • ▲ 아산 정주영에게 빈대의 교훈을 준 옛 인천 부두 노동자숙소 일대ⓒ
    ▲ 아산 정주영에게 빈대의 교훈을 준 옛 인천 부두 노동자숙소 일대ⓒ

    정주영과 빈대의 인연도 널리 알려진 일이다. 19세 때 인천 부두 인천부두 막노동판 노동자 합숙소에서 묵던 그는 밤마다 빈대들이 달려들어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가만히 보니 빈대들이 나무 침상의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가 침상 네 다리에 세숫대야를 놓고 물을 부어놓았더니 며칠간은 잠을 편히 잘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빈대들이 달려들었다. 

     

    헤엄도 못치는 빈대들이 어떻게 올라올까 궁금해하던 정회장은 이유를 알고 깜짝 놀랐다. 세숫대야 물을 건너 침상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빈대들은 벽을 타고 천정까지 올라가 정회장의 몸으로 수직낙하 하는게 아닌가.

     

    그는 ‘하물며 빈대들도 목적 달성을 위해 저토록 머리를 쓰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데, 사람이 최선을 다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고, 이후 직원들이 생각없이 일 할 때마다 ‘빈대만도 못한 놈’ 하며 야단치곤 했던 것이다.

     

    정회장이 ‘빈대 만도 못한 놈’ ‘병신 같은 놈’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것은 직원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담금질시키기 위한 담긴 말이었다.

     

  • ▲ 현장경영을 중시했던 정주영은 직원들에게 욕을 해가며 강하게 단련시켰다ⓒ
    ▲ 현장경영을 중시했던 정주영은 직원들에게 욕을 해가며 강하게 단련시켰다ⓒ

    현대중공업에서 유럽본부장까지 지냈던 황모 전무의 경우,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나와 해외 업무에 밝은 간부로 부장급에 스카우트됐었다.

     

    그는 당시 조선업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였고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영입됐다. 유럽에서 초대형선박을 수주하자 정회장은 그를 신임해 선배들을 제치고 선박 건조와 공기 관리 등 선박 건조의 총책을 맡겼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지만, 여러 현장 여건 때문에 수주한 배를 납기에 맞출 수 없었다.

     

    정회장으로부터 수시로 ‘빈대 만도 못한 놈’ ‘병신같은 놈, 나가 죽어’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배를 완성해 인도는 했지만, 납기 지연 배상금은 물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회사를 떠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그를 내쫓기는 커녕 이사, 전무에 이어 해외 핵심 지점인 유럽본부장까지 맡겼다.

     

    정 회장은 욕으로 간부를 담금질했던 것이다. 또한 어려운 여건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적자가 불가피한 경우라면 적자 폭을 줄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살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