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세상을 뜬 국내외 인물 가운데 뇌리에 강하게 남는 이는 미국의 대표적 보수 논객인 윌리엄 사파이어(Safire)이다. 지난달 말 79세를 일기로 영면(永眠)한 그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여럿이다.

    먼저 다채로운 경력이다. 시러큐스대 재학 중 중퇴한 그는 20세에 뉴욕헤럴드트리뷴에 입사해 신문기자와 유럽지역 방송 특파원을 지냈다. 이어 사업가로 변신해 홍보대행회사를 직접 운영한 그는 자신의 고객 중 한명이던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주방을 공개해 모스크바에서 닉슨 미국 부통령과 '주방 토론회'를 성사시켰다.

    넬슨 록펠러 등의 뉴욕주 지사 선거운동 등에 참여해 직접 정치에 뛰어든 그는 닉슨 대통령 시절 백악관 연설담당 보좌관으로 일했다. 이어 43세에 뉴욕타임스(이하 NYT)로 영입돼 언론계에 복귀했다.

    둘째는 직업인으로서 엄청난 '생산성'이다. 가령 그는 1973년부터 2005년까지 만32년간 NYT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매주 2개꼴로 3000개가 넘는 칼럼을 썼다. '외모지상주의'란 뜻의 '루키즘(lookism)'이라는 말은 그가 만든 신조어이다. 78년에는 미 언론계 최고 권위인 퓰리처상(논평칼럼 부문)도 받았다. 사파이어는 와중에 자신의 백악관 시절을 정리한 회고록과 4권의 소설도 냈다. 이런 정력적인 활동을 높이 평가해서인지 NYT는 진보 매체임에도 불구, 2005년 1월 24일자에 은퇴 특집으로 한꺼번에 그가 쓴 4개의 쿼텟(quartet) 칼럼을 싣는 '예우'를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삶의 에너지를 불살랐다는 점도 흥미롭다. 주말판인 NYT매거진에 79년부터 써온 '온 랭귀지(On Language)' 칼럼을 올 9월까지 계속 연재한 것은 물론, 뇌(腦)과학을 지원하는 '다나(Dana)재단' 회장을 맡아 풀타임으로 근무하며 바쁜 말년을 보냈다. 그가 NYT에 쓴 마지막 칼럼 제목인 '절대 은퇴하지 마라(Never Retire)'는 명제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사파이어는 이 칼럼에서 "우리 모두 노년기에는 재교육과 신선한 흥미 유지 두 가지를 갖춰야 한다"며 "75세 나이인데도 신체 건강한 내가 퇴장하는 것은 '변화를 통한 장수 전략'"이라고 했다.

    실제 비즈니스 세계만 봐도 50~60세를 넘긴 나이에 '늦깎이 변신'으로 인생 후반부를 활짝 피운 이들이 제법 된다. 전세계에 체인점만 10만개가 넘는 KFC를 65세에 창업한 할랜드 샌더스. 시간당 16센트를 받고 석탄 배달을 했던 그는 사업 성공을 위해 60세가 넘은 나이에 여관비를 아끼느라 자동차에서 자고, 주유소 화장실에서 면도하며 '치킨요리 설명회'를 다녔다.

    레이 크록은 30년간의 세일즈맨 생활을 접고 53세에 맥도널드 1호점을 세워 세계적 패스트푸드점으로 키웠다. 젊은 시절 야간업소에서 가수 겸 댄서로 일했던 코코 샤넬은 2차 세계대전 후 15년간의 스위스 은둔생활을 접고 71세에 샤넬 부티크를 다시 열어 프랑스 패션계를 평정했다.

    하지만 이들은 동년배들 중 극소수 예외자이다. 상당수 고령자들은 실직 또는 퇴직 후 현실 적응 어려움과 생활고 같은 문제로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다.

    마침 우리나라의 베이비 붐 세대(1955~63년생)도 내년부터 2018년까지 720만명이 경제 일선현장에서 대거 물러나 사회경제적 대격변이 예상된다. 퇴직자들의 제2인생에는 물론 윌리엄 사파이어처럼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정부나 기업도 효과적인 퇴직인력 활용 방안과 은퇴자 관련 비즈니스와 상품·인프라 개발을 더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사상 초유의 '장수(長壽)시대' 개막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