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대 513조 예산안에 지역 사업비 확보전 치열굵직한 실적은 곧 총선 성적표…묻지마 편성도 여전추석 민심잡기 홍보 문자메시지…연말 삭감 가능성도
  • 추석명절을 앞둔 지난 9일 국회 본관 4층. 주요 상임위원회가 모여있는 곳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강행으로 여야 분위기는 살얼음판이었지만 이 곳은 정반대였다. 바쁘게 뛰어다니며 저마다 휴대전화로 통화하느라 분주한 직원들로 눈코뜰새 없었다.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자신들이 모시는 국회의원 지역구 숙원사업비를 반영하느라 정신없는 보좌관들과 비서관들이다. 이른바 정부 특별교부세(특교세)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올해도 이어졌다.

    이날 만난 한 보좌관은 "예산안이라는게 하루아침에 정해지는 건 아니지만, 마지막까지 빠지고 채워지는 일이 다반사"라며 "오늘까지 반영된 예산안을 최종확인하면 지역구 유권자들에게 'OOO사업 국비 000억원 확보'"라는 홍보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고 귀띔했다.

    정부가 2020년 예산으로 책정한 돈은 513조원이 넘는다. 처음 500조원을 넘는 사상 최고 예산안인만큼 올해 예산 확보전은 유난히 치열했다.

    예년에는 우선순위에서 밀려 예산을 받지 못한 지자체 공무원까지 여의도로 상경해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고 중앙부처 공무원을 대상으로 즉석 프리젠테이션을 벌이는 등 진풍경이 펼쳐졌다.

    행정안전위원회 한 전문위원은 "9월 정기국회의 꽃은 국정감사라고 하지만, 사실 예산 확보에 사활을 거는 중앙부처와 지자체들의 힘겨루기도 못지 않게 뜨겁다"고 했다.

    특히 내년에는 국회의원 총선이 있는터라 소위 '배지'들의 열의도 남다르다. 지난 4년간 지역구에 유치한 사업실적이 당락에 큰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

    3선을 준비하는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지역행사에 얼굴만 비추면 되던 시절은 이제 옛말"이라며 "지역발전을 위해 얼마나 활동했는지 꼼꼼히 살펴보는 유권자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 ▲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내년도 예산안을 설명하는 모습 ⓒ 뉴시스
    ▲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내년도 예산안을 설명하는 모습 ⓒ 뉴시스
    도로 닦고 체육관 짓고… 토목·건설 인기

    가장 치열한 예산유치전이 벌어지는 분야는 역시 토목·건설 사업이다. 새 도로를 내고, 전철 등 광역교통망을 유치하는 것은 소위 '힘있는 의원님'으로 인정받는 기회가 된다.

    지난달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한 GTX-B 노선의 경우 한국당 민경욱, 정유섭 의원에게는 굵직한 성과다. 2014년 한차례 좌절한 GTX-B 노선은 인천 송도(연수)와 부평을 지역구로 하는 민 의원과 정 의원에겐 반드시 따내야 하는 숙원사업이었다.

    정유섭 의원은 "GTX-B 노선을 위해 상임위도 국토교통위와 예결위를 들어갔다"며 "직접 발도 뛴 성과라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다목적 체육시설이나 도서관 등 교육시설을 짓는 사업도 여전히 인기다.

    이같은 다목적 시설의 경우 행정안전부 외에도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등 여러 부처와 협의를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나서지 않고서는 쉽사리 예산을 따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지역구에 큼직한 신식 체육관 건물을 짓고 나면 여러모로 홍보에 도움이 된다"며 "추석 차례상 민심에 올릴만한 실적들은 미리미리 자료를 만들어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전송하고 있다"고 했다.

    당겨 넣고 밀어 넣고… 억지 편성도 여전

    사활이 걸린 지역 사업이다 보니 억지성 예산 만들기로 편성되는 부작용도 적지 않다.

    한 초선 국회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에 보육센터를 짓는 사업을 꾸준히 추진했지만, 관련 부처 협의가 쉽지 않았다. 이미 같은 지역에 보육센터가 지난해 건립돼 추가 개소는 어렵다는게 해당 지자체의 입장이다. 하지만 중앙부처를 설득한 끝에 기본실시계획 용역비를 어렵사리 확보하고 곧바로 홍보에 나섰다.

    행정안전위 한 관계자는 "보육센터는 지자체에서 상당부분 예산을 조달하기 때문에 지자체가 부정적 입장을 계속 유지한다면 실제로 건립되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무작정 예산부터 만들고 보자는 분위기다 보니 국회 출장근무 중인 부처 공무원들도 국회의원들의 등쌀에 곤혹스럽다.

    국토교통부 한 출장직원은 "해마다 9월 국회는 예산확보에 서슬이 퍼런 국회의원들이 불러대는 통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며 "사업성이 부족하다는 판정이 난 현안에도 '일단 다시 검토해보자'고 밀어붙이는 사례가 있다"고 토로했다.

    이런 억지예산들은 예산심의 과정에서 삭제되거나 삭감되기도 한다. 예결위 관계자는 "편성된 예산이라고 무작정 의결되는 것이 아니다"며 "심의를 통해 불필요한 혈세 낭비는 막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