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개정안 입법예고… 공적연기금 지분투자 보고 완화정권 입맞 맞춘 '코드 투자' 우려… 재계 강력 반발야당 "상위법에 저촉, 심각한 법체계 훼손"
  • 정부가 입법예고한 주식 대량보유 보고 제도(5%룰) 개정안을 두고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국민 노후자금인 국민연금기금을 이용한 정권의 기업 경영권 침해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재계가 본격적인 집단 반발에 나섰다.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5일 5%룰을 적용받던 기관투자자의 보고 및 공시의무를 완화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투자자가 5% 이상 기업 지분을 보유하거나 이후 1% 이상 지분 변동이 생길 경우 5일 이내에 관계당국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다만 경영권에 영향을 주지 않는 목적, 즉 단순투자의 경우 약식보고를 하면 된다.

    정부의 이번 개정안은 공적연기금의 보고 의무 완화가 골자다. 공적연기금은 경영목적을 위한 지분 투자라고 하더라도 약식보고만 하면 되도록 했다. 또 지분을 가진 공적연기금이 정관 변경 요구를 하거나 임원의 해임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을 경영개입 행위에서 제외시켰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국민연금으로 대표되는 공적연기금이 일반 기업의 경영개입이 더욱 용이해질 것으로 보인다. 한진가 사태 이후 확산된 스튜어드십 코드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우려다.
  • ▲ 윤석헌금융감독원 원장(왼쪽)과 은성수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21일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에 참석해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뉴시스
    ▲ 윤석헌금융감독원 원장(왼쪽)과 은성수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21일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에 참석해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뉴시스
    재계 강력 반발 "경영권 훼손, 전면 철회해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은 5%룰 완화에 대해 "투자자의 경영 개입으로 인정할 수 있는 범위를 축소해 기업의 경영권 안정성을 훼손하고 있다"며 금융위에 백지화 요구를 전달했다.

    한국상장사협회도 "개정안이 통과되면 국민연금은 어떠한 제약도 없이 집중투표제 도입과 같은 정관 변경 주주제안과 의결권 대리행사 권유 등을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김승희 의원이 경총에게 받은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한 주요 기업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설문에 참여한 10개 기업들 모두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A 기업은 "기업의 적법한 경영활동도 사회적 논란이 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주주활동 범위와 개입의 범위를 넓히는 것은 우려된다"고 밝혔다.

    E기업과 F기업은 "연초 국민연금의 한진그룹에 대한 주주활동만으로도 경영활동에 상당한 제약이 발생했다"며 "법 개정이 아닌 시행령으로 기업감시의 범위를 넓히겠다는 것은 기업의 자율성을 더욱 훼손할 것"이라고 했다.
  • ▲ 윤석헌금융감독원 원장(왼쪽)과 은성수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21일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에 참석해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뉴시스
    세계적 추세도 공적연기금에 대한 공시 의무를 일반 투자자보다 강화하는 움직임이다. 특히 영국과 독일 등은 보고 요건율을 낮추는 등 대량주식보유 보고제도를 더욱 활용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 ▲ 윤석헌금융감독원 원장(왼쪽)과 은성수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21일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에 참석해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뉴시스
    정권에 따른 '코드 투자' 공정할 수 있나

    5%룰 완화에 대한 가장 큰 우려는 국민연금 등 공적연기금이 기업 경영 전반에 개입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국민연금은 국민 노후자금으로 조성된 700조원에 이르는 거대 자본이다. 하지만 이 거대자본이 대표성을 지니지 못한 연금운용본부가 임의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는 지적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국민은 국민연금에게 기업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해 달라고 위임한 적이 없다"며 ""만약 그랬다면 국민은 수탁자인 국민연금에게 위임내용을 제한·변경하거나 수탁자를 해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국민연금의 경영권 개입의 논거는 국민연금법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국민연금법 어디를 보더라도 경영 개입을 위한 의결권행사를 명시적으로 주문한 조항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결국 스튜디어십 코드 도입은 국민연금의 사회적·경제적 영향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역할을 자임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셀프 도입은 일종의 자가발전(自家發電)"이라고 비판했다.

    국민연금의 경영권 개입이 결국 연금운용본부 인사권을 가진 정권의 입맛에 따른 '코드 투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한계점도 문제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주식을 보유한 상장사는 300개가 넘는다. 국민연금은 최근 정부 기조에 맞춰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주식을 대거 사들이기도 했다. 국민노후자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이 안정성이나 수익률 보다 정권의 코드 맞추기에 열중하고 있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특히 최악의 수익률(-0.92%)을 기록한 지난해 국민연금기금 운용 실적을 보면 국내주식투자로 -16.77%나 손해를 봤다. 안정적 투자처인 국내채권(4.85%), 해외채권(4.21%), 대체투자(11.80%) 등에서 수익을 얻은 것과 대조적이다.

    김종석 한국당 의원은 "국민연금은 그동안 KB금융 노동이사제를 추천한다거나 멀쩡한 회사의 대주주 가족이 갑질했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대주주를 교체하려 하는 등 순순하게 국민의 이익을 대표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국민연금의 의사결정구조와 지배구조가 선진화되지 않았는데, 5%룰 완화라는 혜택까지 줘서 사회정책적인 고려를 반영하는 게 아니냐"고 지적했다.
  • ▲ 국민연금기금 2018년 운용현황ⓒ국회예산정책처
    ▲ 국민연금기금 2018년 운용현황ⓒ국회예산정책처
    야당 "상위법 있는데 시행령 개정 꼼수"… 새 입법 추진

    정부의 5%룰 완화 개정안은 상위법인 자본시장법에서 규제하는 항목을 정부 시행령으로 기관투자자에게만 혜택을 주는 꼼수라는 지적을 받는다.

    자본시장법 147조 1항은 5%룰을 명문화하면서 부칙으로 '전문투자자 중 보고내용 및 보고시기 등을 대통령령으로 달리 정할 수 있다'고 예외를 두고 있다.

    김종석 의원 등 11명 한국당 의원들은 이 부칙 부분을 삭제하고, 2항을 추가해 정권 변경이나 회사나 임원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동을 '경영권 참여'로 규정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발의에 참여한 의원들은 "IMF 외환위기 당시 외화 유치를 위해 우리 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을 대폭 제거한 상황에서, 5%룰이 그나마 투기 목적의 자금 유입을 차단하는 간접적인 경영권 방어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또 "정부 계획대로 시행령이 개정될 경우 주식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큰손이자 정부 영향력 하에 있는 국민연금이 보유 주식을 활용해 주주권을 행사함으로써, 관치 논란과 연금 사회주의 논란을 불러올 것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자본시장과 기업 경영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제도의 변경을 국회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법률 개정으로 완성하지 않고 정부가 임의로 시행령을 개정하여 도입하는 것은 심각한 법체계 훼손"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