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10시 이후 배송 제한 권고… 주5일 작업 확산 유도민감한 배송 수수료도 추후 사회적 논의기구에 떠넘겨표준계약서 도입하기로… 택배사 관리책임도 강화
  • ▲ 배송준비하는 택배기사.ⓒ연합뉴스
    ▲ 배송준비하는 택배기사.ⓒ연합뉴스
    정부가 택배기사 과로를 막겠다며 하루 최대 작업시간 설정과 심야배송 제한, 불공정 계약을 막기 위한 표준계약서 도입 그리고 택배기사 사회안전망 강화를 위한 산업재해·고용보험 지원 등을 대책으로 내놨다.

    하지만 일각에선 정부가 민감한 내용은 뒤로 미룬 채 보여주기식 대책을 발표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배송 수수료 인상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사회적 논의기구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루겠다며 사실상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을 연출했다.

    ◇뾰족한 대책 없이 검토 또는 권고·유도키로

    정부는 12일 고용노동부·국토교통부·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 부처 합동으로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먼저 작업시간을 줄이기로 했다. 직무분석을 통해 기준을 제시하고 택배사별로 1일 최대 작업시간을 정하도록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택배기사가 요구하면 물량 축소와 배송구역 조정 등을 조처하고 택배사와 대리점은 물량조정에 따른 지연배송을 이유로 계약갱신 거절 등 불이익을 주지 못하게 표준계약서에 반영키로 했다.

    주간 택배기사의 오후 10시 이후 배송은 업무용 애플리케이션 차단 등을 통해 제한하도록 권고키로 했다. 다만 식품 등 생물의 경우 심야배송을 허용키로 예외를 뒀다. 또한 노사협의를 거쳐 토요일 휴무제 등 주5일 작업 확산을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국토부는 택배서비스평가 기준에 배송 신속성 기준을 완화하고 대신 작업시간 관리제도 도입에 대한 평가기준 신설을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택배사가 심야배송 제한 등에 따르지 않으면 택배차량 증차 규제도 검토한다.

    정부는 노사 간 이견이 큰 분류작업에 대해선 충분한 의견수렴을 거쳐 명확히한 뒤 표준계약서에 반영하기로 했다.

    택배사·대리점 책임도 강화한다. 작업장소인 서브터미널의 시설 안전조치는 물론 건강진단, 직무 스트레스 관리 등 건강보호 조치도 택배사에서 관리하도록 산업안전보건법을 고치기로 했다. 건강진단 결과 뇌심혈관질환 등의 문제가 우려되면 대리점주가 작업시간 조정 등을 협의할 수 있게 법 개정을 추진한다. 택배기사의 직무 스트레스 관리 지침도 마련한다.

    산재·고용보험 가입 등 사회안전망도 강화한다. 노동부는 지난달 21일부터 이달 13일까지 CJ·로젠·한진·롯데 등 주요 택배사를 대상으로 안전보건감독을 겸한 산재보험 적용제외 실태확인 전수조사를 진행한다. 근로복지공단도 다음 달까지 자체 조사를 벌인다. 정부는 조사결과 '산재보험 적용제외' 신청과정에 택배사·대리점의 보험가입 방해나 적용제외 신청 강요 등 위반사항이 적발되면 '제외 취소' 등의 조치에 나설 예정이다. 택배기사는 대부분 택배사·대리점과 위탁계약을 맺는 개인사업자로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에 해당한다. 특고는 산재보험 적용제외를 신청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신청과정에서 대리점주의 강요와 대필 등이 드러나 문제로 지적됐다.

    이에 정부는 앞으로 적용제외 신청서를 택배기사가 직접 제출하도록 고치고 적용제외 사유도 △질병·부상이나 임신·출산·육아 △사업주 귀책사유 등으로 제한하기로 하고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손질하기로 했다.

    고용보험은 두루누리사업을 통해 영세 대리점주나 택배기사의 보험료 지원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홈쇼핑 등 대형화주의 불공정계약 등 갑질도 고쳐나간다는 태도다. 온라인 쇼핑몰 등이 택배사에 물량을 주는 과정에서 개당 600원쯤의 백마진(비용할인 뒷돈)을 챙기는 관행을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대리점이 택배기사에게 부당하게 부과하는 위약금도 개선 대상이다.

    정부는 공정한 계약을 위해 노사 협의를 거쳐 내년 상반기까지 표준계약서를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표준계약서 확대를 위해 택배사업자 등록요건으로 표준계약서 활용을 반영하기로 했다.

    자동화설비 등 인프라도 확충한다. 도시철도 차량기지 등 유휴부지를 활용해 내년부터 2023년까지 공유형 택배분류장을 30곳 이상 확충한다. 택배 분류 자동화설비 보급을 위해 연 5000억원 이상의 정책자금을 확보하고 저리의 이차보전 지원에 나선다.

    정부는 민감한 택배가격도 손본다는 견해다. 택배기사 처우 개선을 위해선 적정 배송 수수료가 담보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택배가격 인상은 소비자 부담 증가로 이어지는 만큼 사회적 논의기구인 택배기사 과로 방지대책 협의회를 구성해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협의회에는 사업자·택배기사·소비자는 물론 대형 화주·국회·정부·전문가가 참여한다.

    정부 관계자는 "발표 대책을 차질없이 이행하려면 국회에 계류중인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의 연내 제정이 시급하다"면서 "조속한 법 적용을 위해 공포 후 6개월 뒤 시행하는 것으로 시행시기를 앞당기겠다"고 말했다.
  • ▲ 택배기사 과로사 관련 기자회견을 갖는 시민단체.ⓒ 연합뉴스
    ▲ 택배기사 과로사 관련 기자회견을 갖는 시민단체.ⓒ 연합뉴스
    ◇민감한 사안은 나중에

    그러나 일각에선 정부의 이날 대책이 수박 겉핥기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핵심의제인 작업시간 단축과 분류작업, 택배 수수료 등에 대해선 노사 의견수렴이나 사회적 대타협 등을 이유로 논의를 미뤘기 때문이다. 기존의 택배업계 내 논란을 백화점식으로 열거해 재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보인다.

    작업시간이나 택배물량 축소 등은 택배기사의 수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데도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택배업계 한 관계자는 "작업시간이나 물량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쿠팡 쪽으로 기사들이 다 갔을 것"이라며 "일한 만큼 더 벌 수 있으므로 물량 조정을 달가와하지 않는 택배기사도 적잖다"고 전했다.

    정부의 작업시간 제한은 형평성 논란도 부를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자동화설비 유무와 평균 배송거리 등 택배사별 여건에 따라 최대 작업시간을 정하게 한다는 견해다. 하지만 자동화설비를 갖춘 택배사는 CJ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다.

    분류작업도 정부는 노사 의견수렴을 거쳐 개선하겠다고만 밝혔다. 뾰족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택배 노조는 3~4시간 걸리는 분류작업이 장시간 작업시간의 원인이라며 분류업무는 택배기사 업무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왔다. 반면 사업자는 분류업무가 배송업무에 포함되며 배송 수수료에 분류수당도 들어있다며 맞서는 상황이다.

    특히 정부는 민감한 택배 수수료 문제를 사회적논의기구에 사실상 떠넘겼다. 문제는 수수료 인상이 소비자 부담 증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협의체가 결국 소비자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적잖다는 점이다. 배송 수수료는 2002년 1200원에서 지난해 800원쯤으로 내렸다. 일각에선 수수료 인하는 시장에서 업체 간 경쟁으로 내린 부분인데 이를 정부가 나서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는 의견이다. 업체 간 가격·서비스 경쟁이 택배시장이 양적으로 성장하는 데 이바지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