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8일 정보 제출기한… 주자니 '기밀유출' 안주면 '불이익' 우려홍남기 "업계의견 최대 반영·부담 완화 지원… 한미 협력 바탕 대응"묘책 '난망'… 삼성 작업환경보고서 공개압박 전력에 진전성도 도마위"CPTPP 가입, 경제적 가치·민감 분야 피해 등 점검해 종합 조율"
  • ▲ 반도체.ⓒ연합뉴스
    ▲ 반도체.ⓒ연합뉴스
    정부가 삼성 등 우리 반도체 기업에 대한 미국의 생산·수급 관련 정보 제공 요청에 대해 기업계와의 소통을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하지만 일각에선 정부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겉으로는 국익을 내세우지만, 속내는 미·중 기술패권 경쟁에 샌드위치 신세가 된 정부가 껄끄러운 상황을 기업에 떠넘기려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없잖다. 문재인 정부가 국가 핵심기술인 반도체 생산 관련 정보의 공개에 '둔감'한 모습을 보였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18일 서울청사에서 첫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를 열었다. 정부는 지난달 27일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글로벌 공급망 차질과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 확산 등 경제와 안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현안을 치밀하게 점검하기 위해 장관급 협의체인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를 신설하기로 하고 이날 첫 회의를 개최했다.

    경제안보회의 첫 안건은 미국의 반도체 정보 제공 요청에 대한 대응 방안이다. 미 바이든 정부는 지난달 23일(현지 시각) 삼성전자를 비롯해 애플, 포드, GM, 인텔, 메드트로닉, 스텔란티스, TSMC 등 글로벌 반도체업계를 초청한 가운데 화상회의를 하고 다음 달 8일까지 최근 3년간 매출과 주문·판매·재고 현황 등 공급망 정보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업계에선 기밀인 기업의 내부정보 공개 요구에 정보 유출 등을 우려하며 난감해하는 상황이다.

    정부는 기업계와의 소통·협력 강화를 거듭 강조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모두발언에서 "기업의 자율성, 정부의 지원성, 한미 간 협력성 등에 바탕을 두고 대응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내외 업계, 미국과 주요국 동향 등 진전사항을 점검하고 정부 간 협의와 우리 기업과의 소통 협력 강화 방안을 중점 논의하겠다"면서 "기업의 민감한 정보 문제, 기업 부담 완화를 위한 정부의 지원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 부총리는 지난 8일 열린 '경제 5단체장과의 간담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국익과 경제·안보적 관점에서 면밀한 대응이 긴요하다"며 "업계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미국 측과 미리 협의하고 대응방향도 강구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우리 기업의 우려 사항을 다양한 채널을 통해 미국 측에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홍 부총리는 지난 14일(현지 시각)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 참석차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과 면담을 하고 기업계의 우려 사항을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홍 부총리는 "지난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구축된 양국 간 글로벌 공급망 협력채널 등을 통해 긴밀히 협력해 나가자"고 제안했다.

    홍 부총리는 모두발언에서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과 우리 기술의 육성·보호 전략을 언급하며 "이번 (반도체 정보) 이슈는 기술·안보·산업·통상 등 다양한 영역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안으로, 최근 공급망 재편과 함께 첨단기술의 확보·보호가 우리 대외경제 안보의 핵심 이슈로 부각하고 있다"고 했다. 홍 부총리는 "선제적 기술확보 대책 마련과 범부처 차원의 촘촘한 기술안전망 구축이 시급하다"면서 "기술 블록화의 가속화에 대비해 전략적 가치가 높은 핵심기술의 선정·발굴은 물론 기술탈취 심화에 따른 인력 기술 보호체계 구축, 기술표준화 대응, 국제공조 강화 등이 핵심 내용"이라고 부연했다.
  • ▲ 홍남기 부총리,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 주재.ⓒ연합뉴스
    ▲ 홍남기 부총리,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 주재.ⓒ연합뉴스
    이날 회의에서 정부의 최종 입장이 결정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첫 회의인 만큼 다른 주요국 동향을 파악하고 기업과의 협력방안을 모색하는 선에서 논의가 마무리될 공산이 크다.

    정부는 국익 차원에서 관련 동향을 기업계와 공유하며 업계 의견을 최대한 반영한다는 태도지만, 일각에선 정부가 미·중 간 기술패권 경쟁 속에 껄끄러운 상황을 기업에 떠넘기려는 것 아니냐는 견해도 없잖다. 미국의 요구가 있은지 3주가 넘어서야 첫 경제안보회의를 열었고, 무엇보다 문재인 정부가 삼성의 반도체 정보 공개에 둔감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2018년 대전고등법원이 삼성전자 온양공장의 작업환경 측정보고서를 산업재해 피해자 유족에게 공개하라고 판결하자, 시민단체 등 제3자에게도 공개하라며 삼성을 압박했다. 삼성은 관련 내용이 경영상·영업상 비밀사항에 해당해 공개할 경우 중국 등 경쟁국가로의 국가 핵심기술 유출이 우려된다고 소송을 냈고 법원은 삼성전자 손을 들어줬다. 당시 노동계를 등에 업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삼성을 길들이려고 중국 등으로의 국가 핵심기술 유출을 도외시한다는 비판이 제기됐었다.

    일부 전문가는 삼성과 SK가 미국 시장에서의 불이익을 우려해 울며 겨자 먹기로 바이든 행정부의 요구를 수용할 거라는 분석이 적잖다. 삼성 등이 이번 요구를 거부하면 미국의 공공조달시장 참여가 제한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이 기업들의 정보 제출은 '자발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국방물자생산법(DPA)을 발동해 자료 제출을) 강제적으로 하고 싶지 않지만, 따르지 않는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경고한 것도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다만 바이든 행정부의 목표가 반도체 칩 수를 늘리는 것이고 한국의 반도체 생산기술이 미국에 전략적 가치가 있는 만큼 물밑 교섭을 통해 공개 수위가 조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한편 이날 경제안보회의 안건에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논의도 포함됐다. 홍 부총리는 "정부는 그동안 CPTPP 가입 추진에 대비해 안으로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밖으로는 CPTPP 회원국과 비공식 협의를 진행해왔다"면서 "오늘은 CPTPP 가입의 경제적·전략적 가치와 민감분야 피해 등 우려 요인 점검, 앞으로 대응과 추진 일정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조율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