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미준수-기술자들의 과신이 불러낸 인재감리-관리·감독 책임 지자체도 자유롭지 않아불법 재하도급 등 건설업계 문제 지적 잇따라
  • ▲ 당국 관계자들이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당국 관계자들이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사 책임자뿐만 아니라 감리자, 감리 일지를 제출받은 관할 구청도 책임을 면할 수 없죠. 건설회사뿐만 아니라 안전관리 시스템 전반에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안형준 전 건국대 건축대학 학장)

    광주 서구 '화정 아이파크' 붕괴사고는 고질적인 안전 불감증, 이로 인한 부실시공, 감독해야 할 지방자치단체의 능력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일어난 사고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기술은 진보했지만 윤리는 오히려 후퇴했다는 평이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이번 참사는 원가 절감을 위한 무리한 속도전이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다. 업계에서는 하부층 콘크리트가 굳기 전 무리하게 타설 작업을 진행해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강풍이 부는 겨울철에는 콘크리트가 더디게 굳는데도 충분히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개된 타설작업 일지를 보면 30층 바닥은 닷새, 25층과 26층은 엿새, 37층은 이레 만에 타설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01동 타설은 사고발생일 기준 최소 12일부터 18일까지 충분한 양생기간을 거쳤다"고 해명한 HDC현대산업개발 측의 해명과 배치되는 것이다.

    최명기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단 교수는 평택 물류창고 화재사고를 예를 들면서 "작년에 공사가 한 달간 중지됐지만, 준공기일은 변함이 없었다"며 "공사가 중단된 만큼 기간이 늘어야 하는데, 안 늘어나다 보니 시공사들이 무리하게 공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발주자들이 공기를 빨리빨리 해달하고 해서도 안 되고, 안전을 고려한 공기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나와야 한다"며 "이런 문화나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계속해서 사고가 난다"고 강조했다.

    행정당국의 승인 없이 일부 공정을 변경했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광주 서구청과 경찰 등에 따르면 현대산업개발은 안전관리 계획을 승인받을 당시 39층 바닥 타설을 일반적 거푸집 공법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39층 바닥 슬래브를 구성한 거푸집 아래에 지지대(동바리)를 받치기 여의치 않자 데크 플레이트를 사용한 공법으로 임의 변경한 정황이 의심돼 경찰 등이 해당 내용을 조사할 방침이다.

    조원철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명예교수는 이번 사고에 대해 이미 만들어진 매뉴얼을 지켰다면 발생하지 않을 사고라고 평가했다.

    조원철 교수는 "책대로 하면 될 텐데 인간의 탐욕이 사고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며 "기술도 사람이 만든 것인데, 기술자들이 이를 너무 과신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감리 과정이 부실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감리가 건물이 설계에 따라 시공되는지를 살피는 등 공사 공정과 안전을 확인하는 만큼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희택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시민안전위원회 위원장은 "날이 추워 콘크리트가 제대로 굳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면 감리가 타설을 못하게 하는 등의 조처를 했어야 한다"며 "타워크레인이 힘을 못 받는 창틀에 고정된 점도 안전수칙이 제대로 안 지켜진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라고 진단했다.

    감리업계의 구조적 한계도 뚜렷하다. 감리가 지자체나 정부를 대신해 공사 현장을 감독하지만, 결국 시공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희택 위원장은 "발주자나 시공자는 원가절감이나 공기단축에 관심을 쏟기 마련인데 감리자가 그들과 계약을 맺는다"며 "국내 건설현장 시스템상 감리는 일을 열심히 하면 잘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감리의 경우에도 발주자나 시공자가 아닌 인허가권자인 지자체장이 선임하도록 개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 ▲ 붕괴사고가 난 '화정 아이파크' 201동. ⓒ연합뉴스
    ▲ 붕괴사고가 난 '화정 아이파크' 201동. ⓒ연합뉴스
    때문에 업계에서는 현대산업개발에 대한 일벌백계도 중요하지만 안전사고 문제를 한 개별업체만의 문제로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감리활동을 보고 받는 지자체나 최종적인 감독 의무가 있는 정부에 대한 비판은 사라지고 개별기업만 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김부겸 국무총리도 최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현대산업개발의 면허 취소와 관련된 질의에 "무조건 면허를 취소하면 거기에 일하시는 분들과 광주현장은 누가 수습을 하겠냐"며 "어떤 형태로든 책임은 물어야 하지만 면허 취소가 유일한 길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광주 학동 참사에서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도 광주에서 또 이런 사고가 되풀이 된데에는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지자체의 역량 부족도 한몫했다고 지적했다.

    조원철 교수는 "현장소장과 감리단장이 일차적으로 책임을 져야겠지만 이 정도 규모의 건설사업이라면 구청에 맡겨 놓을 것도 아니다"라며 "서울시가 건설안전 관리본부를 둔 것처럼 광역시급에서도 공법을 판단할 전문가 집단이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불법하도급 문제도 거론된다. 이번 공사에서 콘크리트 타설은 철근콘크리트공사를 하도급받은 A사가 직접 해야 했지만 펌프카 장비업체 B사 소속 외국인 작업자들이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경찰은 불법 재하도급으로 A사 대표를 별도로 입건했다.

    부실시공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히는 재하도급 형태는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지만 건설업계에서는 이러한 형태가 관행처럼 이뤄져 왔다.

    실제 더불어민주당 김회재 의원이 국토부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6년간 불법하도급 현황' 자료를 보면 2016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최근 6년간 954건의 불법 하도급이 적발됐다.

    업계에서는 수면 위로 드러나기 어려운 불법하도급 특성상 실제 현장에서 발생하는 위법 사례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재하도급 과정에서 축소된 공사비뿐아니라 불안정한 근로계약도 부실시공 위험을 키운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국인 근로자의 경우 안전이나 공법에 대한 충분한 사전교육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현행 법령상 재하도급이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지만 그런데도 불법 재하도급이 발생하는 이유는 주로 이윤추구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는 건설사업 참여 주체의 책임과 역할을 분명히 하는 방향으로 안전관리시스템 전반을 재점검해야 하고 법령 준수가 사회에 정착될때까지 감독과 처벌도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